202067

금문교회 삼위일체주일예배 GGPC Trinity Sunday Worship

조은석 목사 Rev. Eun Suk Cho

 

예수님께 함께 갑시다! Let Us Come to Jesus Together!

마가복음 Mark 6:53-56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When they had crossed over, they came to land at Gennesaret and moored to the shore.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And when they got out of the boat, the people immediately recognized him.

55. 그 온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오니

And ran about the whole region and began to bring the sick people on their beds to wherever they heard he was.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And wherever he came, in villages, cities, or countryside, they laid the sick in the marketplaces and implored hi that they might touch even the fringe of his garment. And as many as touched it were made well.

 

 

오늘은 삼위일체주일(Trinity Sunday)입니다. 지난 주 오순절 성령강림주일 지나고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예배 드리는 은혜를 빕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And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요한복음 John 17:3

 

성령님 아니고야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in the Holy Spirit.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2:3b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생의 길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데 영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들, 성령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을 교회사와 조직신학에서 양태론”(modalism)이라고 부릅니다. 한 하나님께서 시대를 따라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성령 하나님으로, 신약 이후 시대에서는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주장이지요. 이렇게 보면, 한 사람이 직장에서는 사장, 집에서는 가장, 교회에서는 장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양태론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사상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께서는 각각 세 분의 위(Person)로 존재하시지만, 한 분 하나님으로 일체시다는 말입니다. 어렵지요? 조금 풀면, 하나님께서 각각 하나의 위(Person)으로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이 아니시고, 아들 하나님도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스스로 당신께 기도드린 것이 아니지요.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대신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리하면, 삼위는 하나님으로서 같지만 서로는 다르십니다. 삼위는 서로는 다르지만 하나님 되심에는 같습니다.

 

이런 경우를 이 세상의 어떤 관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러면 참 좋겠는데,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다가 이단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양태론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후파 골짜기를 흐르는 강 이름이 트리니티 리버, 곧 삼위일체 강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푸르게 흘러가는 강을 보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사건이 창조구원입니다.

 

첫째로, 창조 때,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우리가 우리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

창세기 Genesis 1:26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는데,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을 뜻하는 의 복수형태입니다. 여기서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구약의 삼위일체 증거는 많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 위에 올라오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드러나셨습니다.

 

곧 물 위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시니라.

And when he came up out of the water, immediately he saw the heavens beginning torn open and the Spirit descending on him like a dove.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beloved Son. With you I am pleased.”

마가복음 Mark 1:10-11

 

순서대로 보면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합니다. 지금 게네사렛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도 !” 영어로 immediately, “즉시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간절했던 것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그만큼 주님께서 당신을 뚜렷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숨기기로 하시면 인생이 어떻게 즉시 주님을 알아보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온 지방으로!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혈루병 여인의 경우처럼 의사들도 고칠 수 없고, 돈도 없고, 기댈 데가 없습니다. 이들은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주님을 찾은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주님께서 게네사렛 지역으로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 고통 받는 무리들을!

 

아직 정확하게는 아니지만그들은 그래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달리면서! 옷이라도 손을 댈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옷이라도! 그 간절함이 묻어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역사 이전이므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지녔던 최소한의 깨달음이라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해 보이신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오순절 이전이라, 베드로가 그 믿음이 불확실할 때였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이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주님을 향하여, 아직 불완전한 믿음이지만 그래도 달려갔습니다. 주님께서 이전에 가르치실 때(마가복음 2:5) 침상 째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주목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그들의 믿음을 보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은 겨자씨보다 작아서,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 불완전한 것이었는데, 주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믿음을 창조해 주심입니다. 들어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to Jesus, the author and perfect of our faith!

히브리서 Hebrews 12:2a

 

믿음의 주라는 뜻은 믿음의 창조주시라는 말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지고 손가락을 넣어 보게 하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온전케 하심이라는 뜻은 약해진 믿음을 강하게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손잡아 일으키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모든 생애와 사역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병 고침사건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향에서, 고향마을 사람들이 보이던 냉담한 반응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님만 보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전혀 뵙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처럼 병을 안고 있으면서, 그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 달려가는 무리 중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병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께 달려가는 무리, 그들 중에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구원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살이의 첫 번째 발걸음은 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를 바로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 때입니다. 하나님 없는 나는 결국 여러 생물 중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면서 결국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천하만국을 다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For what does it profit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and forfeit his soul? For what can a man give in return his soul?

마가복음 Mark 8:36-38

 

흔히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이기적이다!” 그런 비판을 내립니다. 세상은 어떻게 되든지 자기만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지요.

 

19세기 마지막 지점 뉴욕에서 어떤 목회자가 사역했습니다.

 

소위 사회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의 주창자인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 1681-1918)입니다. 그는 신학교 교수 아버지에게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가정예배를 통해 신앙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그렇듯이 갈등하는 사춘기를 거쳐 그는 독특한 신앙경험을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한 곳이 뉴욕의 이민자들이 주로 모여 사는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심환경에서 생존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사회구원의 뜻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삶에서 하나님의 보상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개념이 구약성경에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현재의 삶을 주목하고, 교회가 현재 고통 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가, 그것이 진정한 목회라고 본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전 세계에 흩어진 이후에 예레미야가 개인적 영성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인적 경건의 삶(personal holiness)은 포수기에 형성된 지극히 특이한 현상이지, 큰 그림에서 본 구약성경은 사회구원에 집중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사회적인 구원이 중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선함은 사회적 선함이어야 한다. 사랆이 도덕적인 것은 그가 사회적일 때다. 그가 부도덕적인 것은 그가 반-사회적일 때다.

All human goodness must be social goodness. A man is moral when he is social. He is immoral when he is anti-social.

awf.world. June 4, 2020.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 중에 예레미야가 그 끝에 이르러 달라졌지만, 그것은 나라가 망하여 국민이 세상으로 흩어지는 등, 사회적 환경이 변해서 그랬다는 주장입니다.

 

이상의 모든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틀렸습니다. 구약을 잘못 읽었고, 예수님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의 신학을 길게 설명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02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생각이 오늘 다시 강하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

 

라우쉔부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개인구원가르침을 사회를 무시하고 개인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병든 신앙이라고 꼬집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면, 그러면 교회가 사회적 기관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그 영적인 힘을 상실하고 끝내 문을 닫고 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미국에서 사회구원을 주장하던 교회들의 현주소를!

 

문제는 참된 의미에서 이기적인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럽니다. 진정으로 이기적이라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돌보는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이 왜 비판을 받아야 합니까?

 

자기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비판을 면하지 못해야 합니다. 시간을 함부로 쓰고, 아무것이나 먹고,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하고나 사귀는.

 

개인을 떠난 사회주의는 그 자체가 망령입니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삶에서는 결코 실존하지 않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개인을 살피셨습니다. 개인을 떠나 어떤 집단을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가정이며, “교회이며,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악행을 보십시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민족을 사회주의화하여 일어난 전쟁입니다.

 

개인을 보십시오. 개인의 눈동자를 보십시오. 그 개개인에게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참 목자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I name you, though you do now know me.

이사야 Isaiah 45:4b

 

물론 거짓 이기주의자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이용하고, 자기의 배만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 내 가족만 생각하는 거짓된 사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지 나사로를 방치하고 자기만 소중히 여긴 부자가 지옥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것 보십시오. 진정한 이기주의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개인, 그는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에게 부끄럽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앞에 죄송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자기를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결국 자기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희생도 여기서 나오는 법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 남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타이태닉 사건 때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했습니다. 자존심 높은 사람은 구차한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것 보십시오. 자기를 함부로 하는 사람은 남의 목숨도 우습게 여기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쉽게 저지릅니다. 기왕에 버린 몸! 그런 인생철학이 트러블을 일으킵니다. 깨 쎄라 쎄라(que sera, sera), 그러지요.

 

사랑 없는 경찰관들이나 이번 일을 빌미로 유리창을 깨는 사람들에 앞서, 오늘 우리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없는지 엄중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있다면 지체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힘쓰는가, 여기 집중해야 합니다.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 고향마을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문제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랬더라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그분께서 하시는 일그분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의 내용을 가지고 평가하지, 그분께서 동향사람이라는 것으로써 그분의 모든 권능을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매사에 신중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실 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Do not be afraid of them. For I am with you to deliver you. Declares the Lord.

예레미야 Jeremiah 1:8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 중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But I will deliver you on that day, declares the Lord, and you shall not be given into the hand of the men of whom you are afraid.

예레미야 39:17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예언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심 받은, 철저하게 공인인 그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For I will surely save you, and you shall not fall by the sword, but you shall have your life as a prize of war, because you have put your turst in me, declares the Lord.

예레미야 Jeremiah 39:18

 

오늘날 목회자라도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은 구원하고 자기가 버림받는 경우,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For if I preach the gospel, that give me no ground for boasting. For necessity is laid upon me. Who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9:16

 

바울이 자기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교회 박해자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역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But I discipline my body and keept it under control, les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should be disqualified.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9:27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은 구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인종차별, 전쟁, 죽음, , 기근,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죽음의 세대에서!

 

이 놀라운 확신은 우리의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붙들고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 받아야 합니다!

 

이 간절함이 있어야 아내요, 어머니입니다. 아버지요 아들입니다.

 

예수님, 그 이름은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열심. 이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원하시려고 그 열심을 보이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군대 마귀 들린 한 사람을 찾아서 바다를 건너가신 주님 아니십니까? 풍랑과 바다를 지나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구원 받은 한 사람.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Run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look and note! Search her squares to see if you can find a man, one who does justice and seeks truth, that I may pardon her.

예레미야 Jeremiah 5:1

 

오늘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드러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거리에 구원 받은 그 한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그러면 샌프란시스코가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입니다. 당신이 그 구원을 선포하시게 하시는!

 

당신의 가정에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저런 걱정을 하고 비판을 쏟아놓는 당신은,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게네사렛(Gennesaret) 사람들이 달려들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집단으로 사회적 구성원으로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일일이, 한 명씩, 그 이름으로 아시면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To him the gatekeeper opens. The sheep hear his voice, and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요한복음 John 10:3

 

세상이 이렇게 온통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흘러가더라도, 엎드려 기도하는, 욥과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진정한 개인이 있을 때, 여기서 새로운 소망이 나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For as were the days of Noah, so will be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마태복음 Matthew 24:37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온 세상이 죄악에 물들었지만,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식구를 구원하셨습니다.

 

롯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신약성경은 롯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For as that righteous man lived among them day after day, he was tormenting his righteous soul over their lawless deeds that he saw and heard.

베드로후서 2 Peter 2:8

 

오늘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나를 오늘 이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데 60년이 걸리셨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수많은 기회를 가볍게 여겼고 그 은혜를 업신여겼던 나를 끝까지 참아주셨습니다. 구원의 열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열심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예배에서 이런 열심히 있습니까?

신학.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읽으니 어떤 소설가는 성경을 열 번도 더 통독했다고 했습니다. 묻는 기자에게 그런데 그는 아직도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성경공부는 왜 했습니까? 기독교소설을 쓰려고 했답니다. 책 써서 무얼 하려고요?

 

세상에 구원 받는 일보다 무엇이 더 급합니까? 성경을 읽을 때 그 목적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in them you have eternal life. And it is they that bear witness about me. Yet you refuse to come to me that you may have life.

요한복음 John 5:39-40

 

주님께서 게네사렛에 오셔서, 사람들이 달려올 때,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그들을 구원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은 그들의 관심이 질병에 국한되어 있지만, 장차 영혼의 질병죄의 문제를 주님께 해결 받게 될 날을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desires all people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디모데전서 1 Timothy 2:4

 

나는 금문교회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데 이르는 열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구원을 바라면, 그 바라는 그만큼, 그 구원하시는 주 하나님을 더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금문교회의 내일이 궁금하십니까?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그 말씀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의 능력과 그 은혜를 가지고 땅 끝까지 갈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인터넷 세상입니다. 로마 가도를 하나님께서 깔아두셔서 사도바울이 복음전도의 길로 사용했습니다. 실크로드. 비단길. 오늘 인터넷 루트는 하나님께서 경제, 군사, 문화의 전파보다 복음전파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을 살리는 길. 그게 아니라면 이 세상의 테크놀로지는 결국 망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기업을 살리되 남은 망하게 하고, 자기 명예를 높이되 남은

악플로 저주한다면 그 테크놀로지는 과연 악한 자의 도구에 다름 아닙니다.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영적인 가치, 그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

 

이런 대칭구조가 오늘 미국사회의 문제입니다. (한국도 그렇게 보입니다.) 얼핏 보면 진보를 표방하는 민주당이 보수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정권을 빼앗겠다는 움직임, 그것이 이번 미국 대선 같습니다.

 

그런데 진보는 어디를 목표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며, 보수는 무엇을 지키자는 사람들입니까?

 

진보가 내세우는 목표는 거룩해야합니다. 묻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거룩한 길을 걷고 있습니까? 건설이라는 명목 하에 파괴를 정당화하는 그들은 지금 무엇을 파괴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기는 알고 있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논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Why do you see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 but do not notice the log that is in your own eye?

마태복음 Matthew 7:3

 

이렇게 남의 티를 지적하고, “내가 빼주겠다!” 주장하는 그들의 눈에 들보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보수가 지키겠다는 것은 거룩한 가치여야 합니다. 묻습니다: 그들이 지금 지킨다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진보이든지 보수이든지, 그들의 추구하고 지키려는 가치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아니라면 결국 남의 것을 부수고 자기 이익을 창출하려는 악한 진보요, 자기 기득권을 지켜내어 남의 기회를 박탈하자는 거짓된 보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마르크스가 추구했던 사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요, 영웅 같은 어떤 위대한 개인이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하나님께서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아멘!

 

결론입니다.

 

게네사렛 지역을 달리는 사람들. 이들을 사회로 보는 사람들과 개인으로 보는 사람들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이들의 문제가 분명합니다. 오늘 이것은 질병입니다.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오는 사람들!

 

아무데나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는 이들!

 

이들은 단체로 볼 것입니까? 하나 하나 영혼이 불쌍한 개인으로 볼 것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개인입니다. 악마화를 거부하는 건강한 사회나 단체란 결국 건강한 개인의 모임일 터입니다.

 

나는 대학에서 전공이었던 신학 외에 사회학을 관심을 두고 공부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오랜 세월 사회학 공부에 시간을 쏟았습니다. 오늘까지 얻은 중간결론은 건강한 개인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망령이며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지나간 세대의 역사에서, 아니 오늘 우리 세대에서도 북한과 중국에서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나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 망령의 존재감이 아주 높습니다.

 

손자와 손녀의 눈을 바로 쳐다보고, 놀아주는 즐거움이 없는 사람이 사회운동주의자라면 그가 세우려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입니까?

 

이와같이 개인을 철저히 무시하고 사회주의를 세우려는 자들을 우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보고 있습니다. 다섯 개 대륙, 어디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해 주는 소위 보수주의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안타깝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바르게 서야 합니다.

 

감옥에 갇혀 순교의 날을 기다리던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 강하고

You then, my child, be strengthened by the grace that is in Christ Jesus.

디모데후서 2 Timothy 2:1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Do your best to present yourself to God as one approved, a worker who has no need to be ashamed, rightly handling the word of truth.

디모데후서 2 Timothy 2:15

 

세대는 핑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나도 괜찮다. 이런 것은 사회과학적 대안이지 신앙인의 길이 아닙니다. 사회과학은 통계치를 정의의 기준으로 제시하지요. “상식이 있는 보통사람이라면 죄가 없다는!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오늘 세상을 주도하는 사회논리는 정글법칙, 곧 적자생존인데, (진화론자들의 생각이며 사회진화론자들의 결론입니다만) 우리가 그런 세상과 함께 망하고 말 것입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that by testing you may discern what is the will of God, what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로마서 Romans 12:2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서로 돌보며 서로 아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And ran about the whole region and began to bring the sick people on their beds to wherever they heard he was.

마가복음 Mark 6:55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그 사람이 많아 들어갈 수가 없자,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지붕 위에 끌어 올리고, 지붕을 뜯어내려 그 침상째 주님께 내려뜨린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

And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So, your sins are forgiven!”

마가복음 Mark 2:5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받으니라.

And wherever he came, in villages, cities, or countryside, they laid the sick in the marketplace and implored him that they might touch even the fringe of his garment. And as many as touched it were made well.

마가복음 Mark 6:56

 

개인으로 달려가는 길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 이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이렇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가는 길입니다. 당신도 나와 함께 갑시다!” 오늘 설교의 주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의 사회입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게네사렛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 달렸지만, 그들은 함께달렸습니다. 침상째 이고 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병자들이 손을 예수님의 옷에 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 아닙니까?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은 식구도 친구도 모두 버리고 홀로천국 길을 가는 사람 모습입니다. 여기서 함께 모이는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줄 알지만, 오늘처럼 나는 교회생각을 많이 하는 때가 없습니다. 특히 모이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진정한 교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거기는 구원의 자리이며, “치료의 자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가는 곳입니다. 구원 받은 기쁨을 감사함으로 함께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우리교회 당회는 이달 21일 주일부터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결정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가장 잘 드러납니다.

 

특별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요한복음 John 3:16

 

여러분. 지금 주님께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가는 길에 함께 갑시다. 침상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는 자는 함께 도와, 그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있도록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A new commandment I give to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just as I loved you, you also are to love one another. By this all people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요한복음 John 13:34-35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세대 모든 인간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께 나아가는 길을 걷도록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