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1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뵈뵈 Phoebe

로마서 16:1-2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오늘 본문은 짧습니다. 제목도 짧은데, 어떤 사람, 특히 어떤 여성의 이름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이름은 생소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 단 한 차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중요합니다.

 

뵈뵈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전달한 사람입니다. 겐그레아에서 고린도까지 와서, 거기서 이 편지를 받아 로마에 전달한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이처럼 엄청난 서신을 품고 로마로 전달한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시대의 당대 여성은 한 명의 인격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여성을 남자와 동등하게 대우했는데, 그것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여성 사역자들이 대단히 많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뵈뵈가 중요한 자리에 등장한 것은 전혀 이례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우선 기억하셔야 합니다.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철학적 기초를 놓은 사람이 영국 철학자 존 로크(John Loke, 1632-1704)와 역시 영국 철학자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입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사회계약을 놓고 평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왕정제도를 몰아내는 근대 시민혁명의 정신적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들보다 적어도 1700년 이전입니다.

 

여성이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혼자 여행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토록 소중한 편지 로마서를 한 여성의 손에 맡기게 되었을까요?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만일 실패했더라면 얼마나 엄청난 손실을 입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인류문화유산을 말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기독교 밖에서도 로마서의 가치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손을 떠난 그 편지를 몇 개월에 걸쳐 어떤 여성이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뵈뵈, 그녀의 이름이 로마서에서 16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로마서 16장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이름입니다. 아니, 뵈뵈라는 이름은 성경 전체로 보더라도 로마서에 유일하며, 그것도 로마서 161-2절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전혀 교회 사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여성 뵈뵈에게 그토록 중대한 심부름을 맡긴 것입니다. 서신 전달 이후에도 뵈뵈는 교계에 어떤 이름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보통 무명인간이 어떤 중책을 맡은 이후 그 책무와 관련해서 소위 이름이 뜨게되는 수가 많은데, 뵈뵈는 전혀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뵈뵈, 그 이름은 성경에 바로 여기 단 한 차례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추측이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뵈뵈에 대한 추측은 상당히 개연성이 높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잘 읽어보면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과, 그 역할을 맡긴 사도 바울의 배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이 모든 일을 왜 이렇게 이끌어 가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바울의 로마서는 1-15장이 본문이고, 마지막 장인 16장은 인사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여러 사람 이름을 거론하면서 문안합니다.

 

로마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 명단입니다. 그동안의 사역을 총정리 하는 시점에서, 그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온 것입니다. 다른 서신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긴 명단을 가진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만큼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을 나눈 사람이 많다는 뜻 아닐까요? 로마는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제국 로마의 수도인데, 말하자면 호랑이 굴아닙니까? 거기에 교회가 우뚝 서야 한다는 것은 모든 교회의 공통적인 기도제목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바울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놓고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명한 첫 번째 사람이 뵈뵈입니다. 뵈뵈, 그 뜻은 맑고 빛난다는 뜻입니다.

대개 이름이 그 사람의 성폼을 반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말고 빛난다는 것은 어떤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그 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성령님에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 첫 번째로 거론된 인물이라는 점이 큽니다.

로마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리스트입니다.

 

로마로 가는 사람(1)

뵈뵈

 

로마 현지에 있는 사람(26명 외 무명씨들)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베네도

마리아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암블리아

우르바노와 스다구

아벨레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헤로디온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버시

루포와 그의 어머니

아순그리도, 불레곤, 허메, 바도르바, 허마,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빌롤로고, 올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롬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

 

고린도 현지에서(7)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더디오(기록자)

에라스도

구아도

 

뵈뵈가 로마서를 직접 전달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사명을 맡은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나 로마서를 맡길 수 있을까요?

 

오늘날 로마서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5년쯤 전에 요한복음의 한 조각을 사본으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유리판에 앞뒤로 싼 사본을 보면서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같은 반에 있던 학생들 모두가 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원본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놀라운 일입니다. 사본이 없는 원본!

뵈뵈가 어떤 행로를 택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겐그레아에서 고린도로 왔다가, 거기서 로마까지 가는 길! 오늘날 비행기를 타고 간다면? Expedia.com을 활용해서 항공료를 계산해 봤습니다. 381불이 나왔습니다. 이 비용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드는 325불보다 59불이 더 나오는 가격입니다.

 

당시는 육로와 해로 두 가지가 있었는데, 육로는 불가능한 경우였을 것입니다. 빙빙 돌아가기로는 육로나 해로나 비슷합니다. 그러나 육지는 위험합니다. 그리스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 유고슬라비아를 북서쪽으로 타고 올라 오스트리아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반도로 들어옵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 시내까지 들어가는 길은 한 개인이, 그것도 여자가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여로였습니다.

 

배를 타고 간다고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중해는 항해하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빙빙 돌아가는 아주 굉장히 복잡한 항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직접 그 편지를 가지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님께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15장 후반부에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15:31) 되기를 기도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쩌면 로마에 가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렵게 기록한 로마서를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편지라도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로마서가 로마교회에 전달되기만 한다면 설령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가려던 뜻은 알려질 것 아닙니까? 그리고 로마서 자체가 품고 있는 놀라운 신학적 통찰이 로마교회와 그 지역의 여러 교회에 귀중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자기는 가게 되지 못한다고 해도 편지는 꼭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가 가는 길은 대단히 중요한 길입니다.

 

더욱이 로마서의 중요성이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역사에서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 같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 로마서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회를 창시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신학은 성결교회의 신학적 기초도 놓았습니다. 요한 웨슬리 신학은 순복음과 구세군의 신학의 기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깃든 로마서는 반드시 안전하게 로마교회에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처럼 세계적으로 치안이 안정된 것이 아닙니다. 여행객들은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뵈뵈는 신분이 높은 여자였습니다. 이런 여자가 거리에 나섰다면 도둑과 강도들의 목표물이 쉽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ᅟᅡᆮ.

 

이렇게 위험한 길을 여자에게 부탁했다면, 무슨 뜻입니까?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이었겠습니까?

 

우리가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형제라고 해서 믿습니까? 같이 군대 생활한 전우라고 믿겠습니까?

 

사람 자체를 믿을 수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주로 면식범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일평생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성적인 범죄자는 대부분이 면식범입니다.

 

사람은 성령님에 충만한 사람 아니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에 충만한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기분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입습니다.

 

뵈뵈는 그가 성령님에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님의 지혜를 믿는 사람입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은 결코 자기의 의지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난 주중에 어떤 여성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결혼 11년째 되던 지난 2001, 네 아이의 엄마로서 몸과 마음이 무척 지쳐 있었습니다. 결혼생활도 거의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이었지요. 그때 침대 머리맡에 간신히 매달려 앉아 주님 아무 것도 고쳐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예수님만 원합니다...” 라며 울부짖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로 안식년을 통해 주님은 노스 캐롤라이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는 길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길,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지요.

 

뵈뵈는 그 시대의 여성입니다. 당시 여성은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성들을 동사역자로 기용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만난 리디아(Lydia)는 마게도냐 지역의 첫 성인 빌립보 교회의 초석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은 인간, 그것도 여성을 그토록 중대한 사명을 주어 맡긴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 감히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겸손하게 내려앉는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운 사람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다 해야 합니다. 일을 맡겨놓고도 좌불안석입니다.

 

바울은 그 이름 뜻이 작은 자입니다. 그는 본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의 뜻은 큰 자였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로 변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변화입니다.

 

물론 사울은 히브리어 이름이요,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따라서 한 인물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식 이름 요한과 로마식 이름 마가두 개를 다 가졌던 마가요한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도행전 13장 이후로 더 이상 사울로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인데, 그 뜻은 작은 자입니다.

 

이것은 바울 스스로도 그렇게 불리기를 바랐다는 뜻입니다. 확실히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버렸다는 근거는 없지만,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선호한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사울이 품는 큰 자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로마식 이름이 포함하는 작은 자라는 겸손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긴 바울은, 사람을 신분이나 성별로 차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지역입니다. 고린도에서 동남쪽으로 10떨어진 곳의 그리스 남쪽 사론만에 있는 옛 겐그레아 항구도시입니다. 사도행전 18:18에 따르면, 2차 선교여행 마무리 할 즈음에 바울은 서원을 따라 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뵈뵈는 그 지역 겐그레아에 일군으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일군집사입니다. 뵈뵈는 여자 집사입니다.

 

그는 보호자였습니다. 영어로 helper인데, 그녀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런 신분이 그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에게서 꼭 필요한 도움을 얻는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사람이 도움을 얻는 데는 오히려 성령님에 충만함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남을 도울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영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두 가지, , 1. 가르치시며, 2. 힘을 주시는 역할을 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고 힘을 주는 일, 그것이 진정한 도움입니다.

 

뵈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적어도 로마서 1-15장까지 포함하는 놀라운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영적인 감화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자 아닙니까!”

이런 반론이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그런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알고 기대하는 로마교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왜요? 스스로 낮은 자세를 취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낮추면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진심어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사막에서도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다 망해서 나가는 자리에서도 가게를 열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강하고 돈 많은 사람의 도움만 도움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도움을 얻기는 차라리 복권에 당첨되거나 벼락에 맞는 확률입니다. 세상에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 힘 없고 지혜 없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는 길이 더 좋은 길입니다. 여러분이 낮은 자리에 서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잔치집에 가거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면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뵈뵈 한 사람을 두고, 그가 맡은 놀라운 역할을 두고 우리는 정말 많은 소중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뵈뵈의 손에 로마서를 들려 보내면서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요청하는 두 가지 내용입니다.

 

1.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주님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이란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대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절

 

는 서로 다름을 전제한 것입니다.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조심하고 주의합니다. 극진하게 대접합니다.

 

2.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바, 모든 것을 도와주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처럼 놀라운 신뢰가 또 있을까요?

 

어떤 사람을 보내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도와주라 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가 원하는대로 도와주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손에 암행어사 마패를 들려주거나 백지수표를 싸인 해서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적인 신뢰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요청을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는 보호자였습니다. 여러 사람과 나, 곧 바울을 돕는 자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누구를 보호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여자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남자 아니라 여자라도.

 

그러나 여기 사도 바울의 부탁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뵈뵈가 성령님의 사람이라는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중요합니다. 생각도 성령님으로 하고, 말도 성령님으로 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그가 가는 길을 성령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뉴스를 통해 보는 세상은 무섭습니다. 보통 상식이라고 말하고 평균인간을 기대하지만, 이 세상은 정말 그런 것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비상식적이며 극단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온통 미쳐있는 세상입니다.

술과 마약, 도박에 미친 세상입니다. 거리에 널려있는 술집은 물론, SAFEWAY 같은 수퍼마켓 진열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술을 보십시오.

 

돈에 미쳤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다 돈으로 환산합니다.

돈이 되지 않으면 대학의 전공도 다 버립니다.

이런 세상이 정상이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 식구를, 여자 친구와 남편을 살해하는 세상입니다.

무서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하는 고통의 세상입니다.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사랑과 믿음도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성령님의 새 술에 취해야합니다.

그것이 이 괴로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이 편지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12:1-2)고 권면합니다. 뵈뵈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그런 인품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로마서를 전달했다고 해서 이런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는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돕는 자였습니다. 겸손한 사람이었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뵈뵈는 전심으로 바울을 도왔습니다. 이 도움으로써 로마서가 로마에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귀한 사역을 감당한 뵈뵈의 뒤에 바울이 있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뵈뵈를 귀하게 사용한 바울의 뒤에 성령님께서 계심을 말씀드렸습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처럼, 스스로를 낮게 여길 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성령님에 충만할 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갈 때 진심어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뵈뵈를 보내면서 그가 소용하는 모든 것으로 지원하라!”고 부탁한 바울의 심정을 헤아립니다.

여러분을 보내면서,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자가 되십시오.

진정한 도움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편 121

 

 

기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 가장 낮은 데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뵈뵈처럼 돕는이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영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겸손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