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8

금문교회 종교개혁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브리스가와 아굴라

로마서 16:3-5a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같은 반이었던 옥순이라는 여자아이가 우리 동네 방죽에 빠져 죽었습니다. 말없고 착하기 그지없던 아이였는데, 방과 후 호미로 밭일 했습니다. “누나, 뭘 해?” 찾아온 동생이 곁에 있던 방죽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동생은 사람 살려!” 외쳤습니다. 옥순이는 신발도 벗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동생을 밀어내놓고 자기는 끝내 나오지 못했습니다.

 

여자 교장선생님은 그 아이의 일을 말하면서 울었습니다. 전교생이 쌀 한 봉투씩 걷어 그 집에 전달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방죽이거나 호수를 볼 때마다 동생을 살리고 죽은 그 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로 사십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릴 각오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하여라면 순교도 각오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 무엇을 내려놓으십니까?

 

어떤 교회 목사님이 신장 하나를 기증 받아야 산다고 했습니다. 부목사님이 나와서 대신 설교하면서, 신장 기증자는 손들라고 했습니다.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신장은 단 하나만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통성기도하면서 깃털을 날렸습니다. 깃털이 닿는 성도가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깃털이 도무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날아다닐 뿐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주여, 주시-옵소서!” 외쳤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주님의 종 사도 바울을 위해서는 목이라도내어놓았습니다.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한다니, 이들 부부는 목을 내어놓는 대상이 목회자인 바울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가 있습니까? 최소한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 스티커를 받으셨나요?

 

우리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살고, 죽기를 거부하면 죽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이래 49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윤리세습같은 문제가 큰데, 교회가 세계선교를 위해 문을 열지 않고, 저들끼리의 을 쌓아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도 활짝!

 

교회가 변화해야 합니다. 세상보다 더 빨리, 더 구체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변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하려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변하려면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아는 길은 말씀의 눈으로 보아야 가능합니다.

 

그동안 우리 금문교회는 작은 힘으로 세상을 내다보기 위해 힘썼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나가 신학교육을 감당했습니다.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중국, 러시아, 멕시코, 그리고 아프리카로 달려갔습니다. “SPR”이라는 귀중한 성경의 원리를 발견했고, 올해 이미 한 권의 책이 쿰란출판사를 통해 나왔습니다. 다음 달에 새로운 책 <예배인간 욥기>가 제라서원을 통해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우리 작은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는 놀라운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기도로 합력해 온 여러분과 온 세상의 금문인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보다 큰 힘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교회건축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효과 있는 교육선교를 감당해야 할 필요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드온 300 비전을 품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Fire Dept inspection"을 받았습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통과되었습니다. 건축검사의 마지막 단계를 거의 넘은 것입니다. 이제 몇 가지만 수정하면 다음 주에라도 완공판결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드웨어가 준비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적 변화를 주도하는 교회 성장에 주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헌신된 가정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동안 금문교회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헌신된 가정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제 그동안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달려 나갑니다. 우리는 교회성장에 주력하겠습니다. 성장의 동력을 통하여 온 세상을 향해 더 빠르고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선교기지의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순천중앙교회 임화식 목사님께서 지난 봄 부흥설교에서도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castle)을 쌓는 교회가 있고, (road)을 닦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건축에 공을 들였습니다. 최소한으로도 기도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성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껏 을 쌓은 셈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성은 우리끼리안전하게 잘 지내보자는 데서 시작합니다. 방어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을 닦은 것입니다. 건축하는 지난 84개월 동안도 우리는 세계 땅 끝까지 가는 선교의 길을 닦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로마서 163-5상을 통해서 돌아보려고 합니다.

 

길 닦는 데 교회역사에서 기초를 놓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본인의 발로 밟기도 전에 미리 길 닦아 놓는책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길을 내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정입니다.

 

그의 선교여정을 돕는 귀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극히 일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서 기록과 바울의 로마 선교를 위해 참 소중한 분들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뵈뵈와 함께하신 주님을 묵상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오늘과 내일의 금문인 가정의 모습입니다.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의 애칭입니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사역한 귀한 동역자입니다.

 

바울과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였습니다. 지금 로마서도 고린도에서 기록하지 않습니까? 이때는 제3차 여행 중이었습니다.

 

2차 여행 당시, 그들이 고린도에 왔던 것은 무슨 까닭이 있었을까요? 아굴라는 본래 본도”(Ponts) 출신입니다. 그는 로마에 살았는데, 거기서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새로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와 아내 브리스길라는 천막을 만드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생업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사역했습니다.

 

그러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교회에 안부를 전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 부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다.

 

브리스길라는 남편의 헌신을 기뻐하는 아내였습니다. 보통 남편이 뭔가 헌신 해 볼려고 할 때 아내가 막는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반대하는데 끝까지 일하는 남편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여자의 비협조입니다. “잘 해보시오!” 이렇게 되면 하다가 마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아굴라는 아내의 헌신을 기뻐하는 남편이었습니다. “여자가 어딜 그리 나돌아 댕겨!” 이러면 여자가 힘이 빠집니다. 여자의 도움 없이 남자가 제대로 할 수가 없지만, 남편이 뒷받침 해 주지 않는데 여자가 해낼 수 없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서로 돕는 관계였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선한 일에 경쟁하는 부부관계였습니다. “누가 더 잘하나 보자!” 이런 선한 경쟁이 부부지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니까 돕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앞다투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집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나서야 하는데,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려는 마음이 태동합니다. 이럴 경우 제동이 걸립니다. 큰 소리가 납니다. 예를 들면, 누가 장기기증을 결정하면, 아내와 아이들, 부모가 반대하거나 소리칩니다. “당신 몸은 우리와 상관 있습니다.” “상의도 안하고 이런 결정을 내리다니!” 좋은 일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이것은 집안이 불화하고 끝내 원수가 되어 흩어져 버리게 만드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인 테스트입니다. 보다 강하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영적인 우선순위를 자리 잡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을 위해 목을 내놓았습니다. 위험한 일에 처했을 때, 그를 살리고 보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바울만 아니라 그들이 아는 모든사람을 위해 그랬습니다. 본문에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기의 생명만 돌아보았다면, 그래서 건강과 생명을 위해 벌벌 떨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벗어나 예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로써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껍질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보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내려놓기를 압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39

 

이처럼,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마음에 이 있는 사람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들 부부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동행. 동행이 무엇입니까? 일평생 한 길을 함께 걷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아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 남편이 도와야 동행입니다. 남편이 그런 마음을 품었을 때, 아내가 알아주어야 동행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가두는 관계여서는 곤란합니다. 서로가 격려하고 위로하며 도전하고 힘 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세상의 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뿐 아니라, 이처럼 로마에서 고린도로, 고린도에서 로마로 발로 밟고 다니는 세계인이 되었습니다.

 

길 내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수님께서 성전” “건물에 집중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입니다.

그 성전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사라질 날을 예고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태복음 24:2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없어, 이 사람에게 미혹되고, 저 사람을 따라가는, 그런 어리석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24:4

 

오늘 우리는 건물이 아니라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건물 자체는 그것을 설계하고 지은 인간에 주목하게 합니다. 건물 밖으로 나가 별을 보고 산을 보고 들을 보십시오. 노래하는 새와 피어난 꽃을 보십시오.

 

금문교회는 건물이 대단합니다. 한인교회로서 예외적입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돌아보고, 세계 선교를 내다볼 때, 이것은 기초에 불과합니다. 여기는 베이스 캠프입니다.

 

이 건물, 이 자리, 이 조건은 그저베이스 캠프입니다. 우리 금문교회가 겨우 이런 건물안주하고 만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아멘!

 

우리는 스스로 쌓은 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뜨리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 42편과 43편을 주목해서 읽기 바랍니다. 이 시편은 사람이 자기의 문제자기의 세계을 어떻게 빠져나와 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지, 오늘 우리에게 영적 소통의 길을 보여 줍니다. 개역개정을 먼저, 개역성경을 이어서 옮겨 적습니다.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 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 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 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개역성경 번역이 훨씬 잘 되었습니다. 적어도 얼굴이라는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을 나타나 도우심으로같이 어물쩍 넘어가는 해석은 대단히 곤란합니다.

 

무엇보다 시편 42:5이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시편 42:1143:5의 얼굴은 내 얼굴입니다. 이런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개역개정판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어와 영어(특히 NIV) 번역도 몇 가지 참고했는데 비슷한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불안은 얼굴을 통해 표현됩니다. 이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야 비로소 빛이 회복됩니다. 나는 시편 42-43의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가, 우리를 자아의 껍데기를 깨고 나와 영원하신 하나님을 뵙는 소망을 준다고 확신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껍질을 깰 수 없습니다. 그분, 내게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문을 깨뜨려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껍질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 보십시오. 길은 이미(!) 나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달려 나가는 것, 그것이 길을 만들고 나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우리에게 로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

 

종교개혁의 때는 온통 세상이 경직되었고, 닫혀 있었습니다. 그 세상을 깨고 나온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의 부패한 것들을 모두 깨뜨리시고 내쫓아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이전에 우리는 세 차례 성전개혁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1. 하나는 요시야(Josiah)입니다. 그의 종교개혁을 나는 박사논문으로 썼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들도 개혁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던 예루살렘과 성전에 개혁의 칼을 댄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에스라(Ezra)-느헤미야(Nehemiah)의 종교개혁입니다. 포수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고 세상 길에 빠져있는 것을 개혁한 것입니다.

 

3.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 우리는 또 한 차례의 개혁을 경험합니다. “말라기”(Malachi)입니다. 그는 상하고 병든 제물을 가져와 드리는 제사를 규탄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거짓 신앙생활을 경고했습니다. “치유하는 광선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개혁은 예수님의 개혁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앉았습니다. 죄 용서의 권세를 인간이 차지했습니다.

 

15171031.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인 95개 조항 반박문은 교회에서 내쫓아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스스로 갇혀있던 세상을 박차고 나와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구태의연한 유럽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륙에서 영적인 자유를 가지고 마음껏 예배드리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변했습니다. 타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8세기는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가 개혁을 주창했습니다. 그때 교회가 다시 활기를 찾았습니다.

스펄전(1834-1892)은 영국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는 다시 영국교회를 새롭게 했습니다.

 

지금 영국을 위시한 유럽교회는 쇠퇴합니다. 개혁의 물결은 아무래도 여기 미국 땅에서 솟아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교회가 오히려 동성애를 인정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보세요. 교회에서 내쫓아 버려야 할 것이 물신주의만 아니라 말씀을 거역하는 악한 영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악한 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세 가지 오직!”이 주제였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이것은 당시 가톨릭이 주장하던 행위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 은혜,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금문교회는 말씀이 아름다운 교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앞으로도 그 길로 달려갈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의 말씀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등불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말씀의 은혜 안에서 용서의 기쁨을 누립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말씀의 은혜에 사로잡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사람들을 위하여 목이라도내어놓는 참된 사랑, 참된 은혜, 참된 헌신이 우리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한복음 5:8

 

그 사람이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순종은 곧 회복이었고, 병고침이었습니다. 38년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고난의 길이었고, 죽음의 행진이었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끝내고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귀한 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이 길이 죽음의 길을 벗어나는 길, 생명의 길입니다. 아멘.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거짓과 타협하거나 부패해가는 교회의 길을 버립니다.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 가신 길로 나아가, 끝내 천국에 이르는 참된 교회가 되기를 구합니다.

성도들의 삶을 살피시사, 저들의 고난과 슬픔, 눈물과 한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