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 주일설교#부활신앙#마가복음 12:18-27
- 작성자 :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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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9-25 20:56
2015년 9월 25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부활신앙
마가복음 12: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부활은 뒤로 돌아감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감입니다. Resurrection is not to go back to past, but go forward to the future.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천사 등 영적 존재도 믿지 않습니다. 대단히 세속적인 신앙인 그룹입니다. 이들은 부활과 천사를 믿는 바리새인들과 적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그룹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로 하나로 뭉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예수님 공격은 저들 방법이 있습니다. 주로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저들이 믿지 않는 항목, 곧 부활을 두고 시험했습니다. 부활이 얼마나 근거 없는 믿음인가 생각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궁지로 몰기 위해 물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칠형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이 경우, 신명기 25장에 따르면, 이 여자는 그 동생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래서 낳은 자식은 첫 번째 결혼한 전남편의 아이로 호적등록해야 합니다. 이 법령이 배려한 것은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어도 그 “대”는 이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둘째도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겼습니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대를 이어 줄 사명으로 이 여자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도 자식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모두 차례대로 죽었습니다. 모두 이 여자와 결혼한 후에. 무슨 괴기영화 이야기 같지요?
그런데 이 사건이 사실이든 지어낸 이야기든, 적어도 한가지 질문을 던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입니까?
설마 이 여자가 일곱 남자의 아내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례대로 죽은 일곱 모두가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 여자는 누구를 “남편”으로 불러야 합니까? 이건 정말 대답하기 정말 곤란한 일입니다.
그들이 기대한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부활이 없다네.
생각해 보니 부활신앙은 정말 비논리적이야.
그렇게 대답해 줄 것을 기대했을까요? 아니면,
미안하네. 나도 모르겠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결국 “거짓 예언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따라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백성들로부터 분리시켜, 소위 “divide and conquer” 전법을 따라 주님을 결국 죽이는 데까지 몰고 갈 심산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이 기다리는 대답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그들은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부활신앙에 대하여 오해가 깊다는 지적이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고 감히 부활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늘어놓은 이야기는 부활이 없다는 증거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로써 부활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발상은 참으로 어불성설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주님 앞에 가지고 온 동기는 “오해”입니다. 무슨 오해입니까?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경말씀에 부활신앙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바 없습니다. 부활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광야에 물을 내시고, 사막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에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믿음”으로써 출발하여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안셀름(Anselm)이 말한 바, 깨달음을 추구하는 믿음(Faith in search of Understanding)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말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의 내용인 “부활”에 대하여 따지고 논의하고 묻고 도전하는 것은 전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왔다면, 예수님 앞에 서서, 저들이 해야 할 유일한 바른 태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그 믿음 위에 서서 깨달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 구하는 태도는 이렇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10b
그런데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부활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왜요? 이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리에서 깨달음을 논하는 것은 전혀 쓸데 없는 일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TV 토론 같은 데 나가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물론 심지어 빌리 그램함 목사까지 믿음 없는 자리에 서서 논쟁하다가 마침내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두개인들이 믿음을 저버린 상태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 앞에 와서 “깨달음”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리가 또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저들이 들고 온 칠형제 이야기로써 말하고자 한 주장, 곧 “부활이 없다”는 논리는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말씀, 곧 출애굽기 3장에 기록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셨습니다. 가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고 계셨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해 말씀하신 세 명의 족장들, 곧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들어 당신께서 곧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을까요? 모세 이전에 적어도 430년 이전에 죽은 그 세 사람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락하셨던 “약속”은 살아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세 조상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400년 넘도록 “잊혀진 사람들”처럼 살아왔던 이스라엘에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 그대로 “구원주 하나님”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시거나, “신화적”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바 그대로, 그들의 후손, 애굽에서 신음하는,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구속하여 불러내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불러내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성경말씀”에서 배웠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에스겔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을 살려내어 군대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어내신 창조의 사역에서 드러납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창조//출애굽 다이내믹스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이 다이내믹스는 하나님의 말씀, 곧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바 구약성경과, 또한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다는 증언인 신약성경을 포함하는 “성경전서”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났고, 부활의 능력은 창조와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사두개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부활신앙을 논하러 주님께 나왔다면 오늘 본문의 사두개인처럼 어리석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이것 보세요. 부활은 명령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장사행렬을 멈추게 하신 주님께서, 관 안에 들어있던 청년 시체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누가복음 7:14b
바로 이 명령을 듣고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복음 11:43b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그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거나, 그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이거나 무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다.
요한복음 5:24
진신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25
그렇습니다. 지금 문제는 사두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와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대신” 자기들의 말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들음이 없이 말하기 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법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오히려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비극입니다. 이 비극은 비단 사두개인들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율법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포함한 유대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재판 자리에서 마주했던 본디오 빌라도도 예수님께 진리를 물었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한복음 18:37d-38
그러나 그는 진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묻기는 했으나 듣는 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있었습니다. 마른 뼈들을 향하여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들이 살아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2-13
사두개인들은 어리석었습니다.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지지 못했고, 그 신앙에 걸맞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 앞에 지혜를 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따지고 저들의 무지를 확인 받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더라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아하, 그렇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신앙을 품고 부활에 대한 지식을 얻었더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그런 기본 지혜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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