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 주일설교 "선한 목자" 요한 10:1-21
- 작성자 :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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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6-23 00:09
2013년 6월 23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21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예수님께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러면 좋은 것 아닙니까?
이처럼 좋은 목자를 만났으니, 우리 생명을 구원해 주시는 목자 예수님을 환영해 드리고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분쟁이라니요? 입을 모아 “예수님 찬양”을 드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그가 귀신이 들려 미쳤다. 어찌하여 그의 말을 듣느냐?”
다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이 두 그룹의 논쟁의 요지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렸느냐, 아니냐?”입니다. 그들이 논쟁하게 된 근거는 바로 그분의 말씀입니다. 즉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 들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그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양이 목자를 위해 죽어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목자가 양을 위하여? 그러니 미쳤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미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말이 아닙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 그 자체를 주목했습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가 없다는 논지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없었더라면 다른 그룹의 이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주장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두 그룹 모두 다 예수님의 말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어떻게 목자가 “선한 목자”와 “삯군”으로 구별될 수 있느냐?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삯군” 아니냐? 돈을 받고 일하지, 자기의 목숨을 양을 위해 내려놓는 목자가 어디 있느냐? 있다면 그는 미친 목자 아니냐? 그런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믿습니다. 그 사람(person)이 누구이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한 말(word)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믿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의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듣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 두 번째 그룹의 유대인들이 “가장 유대적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헬라인은 어떻습니까? 철학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논리”가 아니면 믿지를 않습니다. 말의 논리를 따집니다. 오늘 유대인들 중에 첫 번째 그룹 사람들이 다분히 “헬라적 유대인”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양을 위해 목숨을 내려놓는다는 말씀은 “어불성설”입니다.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 아니고는 감히 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적입니까? 논리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세우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 당신 자신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이십니다. “목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전을 말할 것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양을 사육하는 사람. 그가 목자입니다. 자기의 목적이란, 예를 들면 아이들 학교공부를 시키기 위해서거나, 양털을 팔아 집을 짓기 위해서거나, 파티에 갈 의상을 마련하기 위해서 등, 양을 치는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말하자면 양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목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모든 목자는 학교 등록금을 내야 하는 아들의 “아버지”일 수 있고, 파티 의상을 사야 하는 여자의 “남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런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목자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미친 목자”입니다.
어제 김요섭 전도사가 한주일 동안 고향 집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광훈 목사는 “양문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양문교회. 오늘 본문인 “양의 문”에서 난 교회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이시고, 동시에 그 목자가 통과하는 양의 문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주체-객체가 동일한 “독특한” 논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의 파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논리를 넘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런 논리의 파괴는 히브리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하나님의 어린양”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은 양을 잡는, 제사의 주체입니다. 양의 제사의 객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시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린양이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문”이시기도 한 논리입니다.
비논리.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제 정신을 가지고는 “미쳤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차원. 그것이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건 불가해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모진 고난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의 길은 보통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미쳤다!”거나 “귀신의 능력으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식구들조차 “미친” 예수님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거침돌”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논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목적은 “이윤”을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설립한 회사에 입사하여 일하는 사원들은 자기의 “양”입니다. 이런 경우, 사주는 “목자”인 셈인데, 목자는 양을 이용하여 자기의 영리를 도모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누구라도 자기에게 돈을 벌어다 줄 수 없는 사원을 뽑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주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사원을 뽑을 때 그 사원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려고 그에게 “일감”을 준다면?
그래서 끝내 자기는 망하고 말았지만, 사원들은 그 사이에 모두 아이들 학교 보냈고, 부모님께 맛있는 것 사다드렸다면? 그러면 그는 기업활동이 “영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다지요? 저는 일년 동안 남 좋은 일만 했습니다.
남 좋은 일만?
네. 똔똔입니다.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려고 기업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신은 그 일년 동안 사원들의 가정에 먹을 것을 주었고, 그들의 자동차에 기름을 넣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을 학교 보냈습니다. 그러면 성공한 기업활동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목자로 모신 인생은 복된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미쳤다”는 평가를 면하지 못합니다.
미친 사람에게는 멸시와 천대, 끝내는 몽둥이와 칼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제대로 가는 길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참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이십니다. 논리로 따져서 “그런 분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나는 못 믿는다!” 그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게로 오신 예수님, 내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믿고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목회자의 삶을 돌아봅니다.
이 지역에 어떤 목회자 가정이 있습니다. 자녀가 아홉이나 되었는데,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병자를 심방 갔다가 그만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친구들이 물을 것입니다. 자식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목양이 자기의 자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삯군 목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려놓았습니다.
목회자들은 자녀교육에 철학이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교인들의 자녀들을 위해 힘쓰고 애씁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의 자녀를 위해서는 그만한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 자녀는 하나님께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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