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성도를 온전하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교회

시온주의 & 교회주의

  • 작성자 : pastor
  • 조회 : 4,858
  • 13-09-20 17:59

1948,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전격적으로 세워졌다. 묻는다. 이스라엘 건국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성급한 어떤 인간집단의 정치-외교-군사적 행동인가? 일부는 구약성경/히브리성경의 변종 아닌가? 종교가 정치세력의 정당화를 위해 존재할 때 그 부패는 정치보다 더하다. 안 그런가?


2013년 여름, 휴가에 나는 홍성혁 교수가 번역한 러셀 교수의 <하나님의 계시>를 읽는다. 고맙게도 여기서 어떤 해법을 찾아냈다. 구약에 내재한 묵시문학의 흐름에 신약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는 복음서는 물론 바울의 서신에서도 묵시문학은 주류다. 요한계시록은 물론이다. 묵시운동 안에서 교회는 영구한 구조물이 아니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형이다. 교회는 천국에서 사라진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2-23

역설이지만, 교회는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그 자리를 내어놓아야 한다. 지금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건설된 시온주의는 변종이다. “사라져야 할 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이어야 한다. 안 그러면 교회나 이스라엘이나 모두 이 세상의 악의 뿌리. 고통을 주고 파괴를 일삼는, 말하자면 악의 근원이다. 사라져야 한다. 평화롭던 중동을 전쟁과 파괴의 자리로 변화시킨 그들의 행동을 구약성경으로 합리화하는 건 어리석다. 더욱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일부를 부적절하게 인용하여 세대주의적 발상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지금 정치세력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모든 판단과 행위도 정당화된다. 그런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히틀러에게 당한 유대인들은 불쌍하다. 그러나 매운 시집살이를 거친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킨다. 지금 이스라엘은 불쌍한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엄청난 핵무기와 살상무기로 압박을 가한다. 기억하라. 지난날의 피해가 오늘의 박해를 정당화 시키지 않는다.


오늘 시온주의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무섭게 도전한다. 1948, 이스라엘이 건국될 당시 세계의 양심적 유대인들은 반대했다. 저게 유대인들의 박해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하는 도구가 될지, 아니면 지난 4천년 동안 방랑했던 저들의 분노를 칼날로 벼려놓을지, 오히려 후자를 놓고 염려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염려하는 유대인 양심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UC 버클리에서 히브리 성서를 가르쳤던 밀그롬 교수도 지금 히브리대학에 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의 정상적인 흐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완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치심에 바탕을 둔,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된 교회가, 주님의 머리로 삼는 교회가 마땅히 핍박을 끝까지 견디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지금 시온주의를 본받으면 안 된다. 그러면 교회주의로 굳어지게 될 것이고, 세습 같은 온갖 정치적이고 책략적인 장치가 깃발을 높이 세우고 일어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세상의 평안을 추구하지 말라. 그건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같을 수 없다. 샬롬! 이것은 세상에서 구할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깃발을 세워 주시고, 영광 중에 우리에게 임하실 때 오는 참된 평화다.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거기서 배울 것은 분명하다. 성경해석의 바른 길에 서야 한다. 결코 정치제도화된 이스라엘에 정당성을 주어선 안 된다.


시온주의는 안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구약의 시온은 신약의 교회. 그러므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시온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메시야주의여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셨다. 그러므로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이미 오신 메시야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은 그 메시야주의마저 버리고 시온주의로써 철저하게 세속적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핵무기와 살상무기를 앞세우고 지난 날의 상처를 훈장처럼 내걸면서 군사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건 아니다. 평화를 위해 지음 받은 인생이 이럴 수는 없다.

파수군으로서의 이스라엘이 바르게 걸었어야 할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의 일군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져야 했다. 그래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옳았다. 그러니까 구약을 가지고 예수님 없이 스스로의 정치-외교-군사적인 자생 이데올로기를 삼는 그들은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구약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책이다. 결코 유대인이 장자의 명분을 주장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장자의 명분은 그리도의 교회에 있다. 그러므로 시온주의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어떤 목사는 유대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그래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미드라쉬를 배운다. 전 세계 노벨상의 15%를 점한 유대인들의 처세술과 가정교육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왜 그러실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의 행태를 도리어 정당화하는 길임을 왜 모르는가? 우리 주님을 욕되게 한 자들이다.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은 전 세계 나라들 중 하나다. 그뿐이다. 정치-외교적 역량이 다하면 사라질 것이다. 그뿐이다. 교회는 그들의 존재와 행태,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정도를 넘어선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우리는 선교의 길을 걸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인간의 논리로 변질시키고 마는 엄청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2천년의 교회사에서 그걸 배웠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 속에서도 그럴 알았다. 지금 우리는 시온주의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어떤 유대인을 안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동조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만날 사람이 있다. 소위 메시아닉 쥬가 그들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그들의 메시야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대안일 뿐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메시아닉 쥬를 한마디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이 다 이스라엘인으로 자기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여기 지적한다.


나는 온 세상 이방인들이 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 유대인들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말한 사도바울의 로마서 9-11장을 다시 읽는다. 이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오히려 얼마나 유대인들이 완악한지, 출애굽 당시의 바로와 결코 다르지 않게 그 마음이 강퍅하고 또 강퍅하여, 바울은 발길을 돌려 이방인에게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너희들도 결국 구원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한 이후다. 너희는 처음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나중이 되고 말 것이다. 너희들의 교만과 완고한 마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다.

이스라엘이 건국했으니 종말에 이뤄질 중요한 예언 하나가 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묻는다. 지금 온 세상 이방인들이 다 구원 받았는가? 그래서 유대인에게 왔는가? 아니다. 이런 발상은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첫째로, 온 세상은 아직도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았다. 둘째로,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인의 구원과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나라를 세운 것이 어째서 구원이냐? 교회를 세우고 구원을 보장한다는 교회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 나라라는 준엄한 긴장 아래서 모든 교회가 날마다 때마다 검증되어야 한다. 그것이 개혁교회아닌가? 그처럼 개혁되고 또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는 끝내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사라져야 할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 저기 중동의 이스라엘 나라도 그런 임시적 거처로 자처한다면, 그래서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과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한다면, 그렇다면 그들의 시온주의를 나는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자기의 존재를 무조건 전제하고 시작하는 폭력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들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세상의 어떤 조직도(그것이 나라가 되었건 교회가 되었건) 미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앞에서.


나는 여태 나라로서의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대등하게 놓고 비교한 바 아니다. 시온주의와 교회주의, 이 둘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지적할 뿐이다. 다만, 시온주의와 잇대어 비교되어야 하는 오늘의 교회주의 교회의 현주소가 지극히 슬플 뿐이다.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야 한다. 비록 모형일 뿐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모형아닌가! 비록 모형일 뿐이지만. 교회는 교회의 영적 자긍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생존방식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우신 주님의 몸이다. 교회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는 금문교회 고 김인성 장로의 말이 가끔 생각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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