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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과 산문에 대하여

  • 작성자 : pastor
  • 조회 : 4,910
  • 14-01-02 08:57

시문과 산문에 대하여

흔히 시문은 어렵지만 산문은 이해하기 쉽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는 압축, 추상, 그리고 직관 등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중심을 꿰뚫어 이해하기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산문의 경우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풀어놓기 때문에 논리와 사실이 가장 적절하게 배치되어 정보전달이 쉽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본문을 이해하는 데까지만 맞는다. 실제로 성경읽기에 들어서면, 시편이나 전도서 같은 시가문학은 가슴에 바로 와 닿는다. 시가문학을 읽고나면 대단히 짧은 시간 내에 가슴이 뛰고 눈빛이 달라지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창세기나 출애굽기 같은 산문은 그 말하려는 뜻은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오늘 나의 삶에 어떻게 와 닿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알겠는데 오늘 그가 나와 어떤 점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답이 명확하지 않다.

나는 시문읽기를 일종의 “침 맞기”에 비유한다. 침은 논리가 아니다. 혈맥을 찔러 들어오는 침 한방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안이 밀려온다.

그러나 산문읽기도 침 맞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산문에 묘사된 그 사람과 나 자신의 “일치”를 경험할 때다. 시문의 경우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그 시문의 기록자 내지 화자와 나 자신의 일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문은 그 기록자 내지 화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큰 상관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일부 시편은 표제가 없다. 산문은 그 기록자보다는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더 중요하다. 산문읽기의 관건은 과연 내가 그 산문 안에 어떤 인물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치점을 발견해 낸다면 곧바로 나는 강력한 침 한방을 맞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나는 SPR 이론에서 이 “일치점 발견하기”를 함수값 x를 SPR에 “대입하기”로 정의했다. 나 자신은 미지 함수값 x다. 나는 나 자신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나를 알 수 없다. 다만 창조//출애굽의 다이내믹스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S), 파송하시며(P), 안식하게 하신(R) 그 뜻 안에서 내 위치를 발견할 뿐이다(SPRx).

이렇게 되면, 시문이든 산문이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그 인물을 만날 때 나는 그와 동질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 동질점은 곧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바로 그 성경의 인물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났듯이(참고. 히브리서 4:12) 나도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그 순간순간에 나는 강력하고 놀라운 침을 맞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화감동하심이라는 침!

이렇게 되면 성경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고, 나는 성경말씀 안으로 들어간다. 말씀과 나는 혼연일체가 되어, 말씀순종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기쁘고 감사한 일이 된다.

시문을 산문처럼 읽고, 산물을 시문처럼 읽는 것은 가능하다. 모양새는 다르고 느낌도 동일하지 않지만, 산문은 직선으로 내게 날아오는 화살 같은 해돋이라면 산문은 굴절하는 영상으로 다가오눈 저녁노을과 같다.

따지고 보면 시문 안에 산문이 들었고(예를 들면, 역사시 같은), 산문 안에 시문이 있다(예를 들면, 출애굽기 15장 같은). 성경을 전체로 읽자면, 시문도 산문도 결국 한 덩어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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