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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주일설교, 임마누엘 (마태복음 1:1-25)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217
  • 14-01-04 20:46

201415

금문교회 신년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임마누엘

마태복음 1:1-25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2014년은 마태가 복음서에 묘사한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일 년 동안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빕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성경을 끝까지 읽어보려고 결심한 사람은 구약보다 신약을 주로 선택합니다. 신약 중에서도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손에 닿습니다. 맨 앞에 있는 책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장을 읽어나가면서 큰 부담에 빠집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데, 이름도 생소할뿐더러, 그 모든 이름을 순서대로 다 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부담 때문에 성경읽기의 첫인상이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드리자면,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등장하는데, 모든 족보는 맨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결되는 맨 나중 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전초전”(opening game)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장의 경우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족보에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이 부각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사실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다윗이 중요한 인물인 것은, 그를 의미하는 14라는 숫자가 예수님 족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 다윗부터 바벨론 포수까지 14, 그리고 바벨론 포수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14대 등,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세 덩어리의 14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14라는 숫자는 다윗의 숫자인데, 666이 사탄의 숫자인 것과 같은 관계입니다. 다윗을 히브리어로 쓰고 그 히브리어의 수가를 합하면 4+6+4=14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도 하고 다윗의 자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 혈통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을 예고하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네게서 날 자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보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과의 사이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동정녀였습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임마누엘처럼 신학적으로 깊고 놀라운 뜻을 품은 것이 또 있을까요?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보았다가는 곧 죽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셨는데, 힘있고 강한 모습,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작은 나라 유대, 그것도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병원이나 민가가 아니라 말이 자는 외양간의 구유, 그 위에 뉘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본래 인간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죄인은 누구나 가장 낮고 천합니다.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사람이 사는 모습이라는 것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다. 가만 보면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생각하는 것은 온갖 추악한 것 뿐입니다. 저는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분들과 마음 깊은 대화를 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언어는 썩고 병들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대로 다 하고 만다면 다 간음자, 살인자, 배교자, 불량자, 불효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막아주셨기 망정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에게 임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인간은 스스로 절망의 길로, 죽음의 길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죽고 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봅시다. 주님께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대목수그런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실이나 공장을 가진 기업가도 아니었습니다. 구두통 같은 데 잔못 몇 개와 톱 하나와 망치를 넣고 어깨에 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여기 의자 부서진 거 있습니까? 탁자 고칠까요?” 그렇게 다닌 것입니다. 대개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목수 일은 배우지 못한 사람도 하는 것이니, 당연히 학력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동생들도 우습게 여겼습니다.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 다니면서 설교하실 때, 동생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것은 본래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히 하나님이셨습니다. 동화책 왕자와 거지그런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평민 옷을 입고 민정시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386 대학생들 중 운동권은 학력을 속이고 공장에 취직하기도 했습니다. 내 친구 하나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위장취업 여대생과 결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에서 낮은 곳에 내려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말하자면 이 세상의 어떤 경우를 들어 설명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그렇게 오셨습니까? 천대 받고 무시당하고, 비웃음 받는 삶을 왜 사셨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오셨습니다. 왕노릇 해도 부족할 판에 십자가는 웬 말입니까? 도대체 십자가가 하나니므이 아들 예수님의 어깨에 가당키나 한 물건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 하나님의 참사랑과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인간들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탄생하시기까지 수많은 예언자들과 지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 그리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며 신실함입니까?

예일대학의 니꼴라이 월터스토프라는 은퇴교수가 있습니다. 25세쯤 난 아들이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쓴 책이 <아버지의 슬픔>입니다. 이 책은 그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 시달렸는지, 죽음의 고통을 겪었는지 기록했습니다. 행간에 흘러 넘치는 그의 눈물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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