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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주일설교 "세례요한" 마태 3:1-12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679
  • 14-01-25 16:32

2014126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세례요한

마태복음 3:1-13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

그는 젊어서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를 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계훈제

나는 그분을 중학교 때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품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나를 지명했습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뚜렷하고 분명한,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품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

그는 이미 태어나기 700년 전에 예고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로 예정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1996106일 주일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때 금문교회 청년부 강승규 형제는 나는 소리요를 특별찬양으로 불렀습니다.

나는 소리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그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요

그 찬양을 들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번주 내 마음의 주제는 “Slavery”입니다. 출애굽기를 2014년 신년특별새벽예배 말씀으로 정하고 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중에 이번 학기 나는 CCSF에서 African American History before the Civil War를 청강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Twelve Years A Slavery를 관람했습니다.

온통 내 마음에는 노예와 자유인이 주제였습니다. CCSF의 학교 교훈은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였습니다. 다 아시는대로 이 말씀은 요한복음 8:32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의 값은 무엇보다 비쌀 것입니다. 자유는 그토록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자유를 헐값에 팔아버리고 맙니다.

두 가지가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1. 전쟁포로, 2. 채무포로

이 두가지 모두 인간이 얼마나 무책임하며 사악한 존재인지를 말해줍니다. 2007년 어느날, 나는 San Francisco Chronicle에서 다룬 성노예문제에 대한 항의단체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피해 여성은 한국 처녀였습니다. 그 여자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사치품을 카드로 긁어 사다가 카드빛 때문에 미국에 건너와 맛사지 등지에서 일했습니다. 안타깝고 안타깝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 마약, 노름에 빠져 빚더미에 깔리는지 아십니까? 이들은 그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식구들을 팔아 넘기기까지 합니다. 급기야는 자신도 종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노예생활

이것은 옛날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곳곳에, 심지어 미국 땅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비극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그 소식을 선포하는 일은 놀랍고 기쁜 일입니다.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도록, 그 일은 소중하고 또 소중한 일입니다.

세례요한은 그 기쁨에 충만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복음 3:29

나는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기쁨에 충만한 사람은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불만족인 사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자기 집안일에 기쁜 사람은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자는 집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먹는 염려도 없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이 음식이었습니다. 미식가라고 있는데, 그들은 맛있는 음식을 위해 인천에서 목포까지 내려간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점심을 먹으러 인천에서 목포까지!

그러나 세례요한은 메뚜기를 먹었습니다. 메뚜기도 푸른 초장에서나 누렇게 익은 황금물결치는 논밭에서 나는 메뚜기는 보기도 좋고 맛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난 메뚜기는 무섭게 생겼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걸 송장 메뚜기라고 불렀습니다. 설마하니 눈이 멀었을리는 없는데, 생기기를 그렇게 험악하게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석청을 먹었습니다. 아무데나 야생 벌이 쳐놓은 꿀을 손으로 따 먹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옷을 가죽옷을 입었습니다. 가죽옷이라는 건 요새 말로 무슨 밍크코트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렇게나 죽은 짐승의 껍질을 벗겨내어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간 세례요한은 오로지 한가지 일에만 골몰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면서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성령님께서 내려와 그의 위에 임하는 자, 그가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광야에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산 사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입니다. 그도 가죽옷을 입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 위해 왕 앞에도 담대하게 섰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왕은 아합이었는데, 그의 여자 이세벨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므로 팔 수 없다고 주장하자 그만 몸저 눕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이 거짓 증인들을 세워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엘리야가 나섰습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불의를 참지 못했습니다. 헤롯이 자기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려온 일에 대하여 지적하면서, “그것은 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급기가 헤로디아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이 선물을 약속하자, 딸은 어미에게 갔습니다. 어미는 왕에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날 세례요한은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세례요한과 엘리야.

이 두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설령 자기를 죽이겠다는 목숨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세례요한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들을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픈 일이겠지만, 끝내 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걷도록 영적인 도전을 한 것입니다.

세례요한 같은 사람은, 오늘날 거짓을 행하는 많은 정치인, 경제인들, 그런 무리들에게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거짓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도전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은 스르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돌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십니다. 자기는 겨우 물로 세례를 주어, 성령세례를 준비하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세례요한은 거짓된 자아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광야에 혼자 있을 때도 거짓 자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고독하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까, 사람은 스스로를 정말 버러지보다 낫지 못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독방에 오래 수감되면 이처럼 스스로의 자존감을 내려뜨리고, 가장 낮은 자존감을 지니는 수가 많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해서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독방에 가두는 세력이 염두에 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지면 스스로 우쭐해져서 아주 높은 (지나치게 높은!) 자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나온 세례요한에게 군중들이 둘러쌌습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아온 그의 삶에 일대 변화가 일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릴 수가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때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오랜 무명의 옷을 벗고, 언젠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유명해질 때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명의 때보다 급작스럽게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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