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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주일설교#영적 네트워크#마가 2:1-17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331
  • 15-02-20 19:54

2015222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영적 네트워크

마가복음 2:1-17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을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시니라.

풍경화 중에 랜드스케이프(landscpae)가 있고 시티스케이프(cityscape)가 있습니다. 랜드스케이프는 자연 풍경이고, 시티스케이프는 시내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림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해 보지요. 그는 우선 대지에 뿌리를 박고 섰습니다. 뿌리가 없다면 설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뿌리가 없다면 영양분을 받아먹을 수 없어서 곧 시들어 죽고 말 것입니다. 하늘과도 통합니다. 햇볕을 받을 수 없다면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바람도 필요하고 공기도 물론 필요합니다.

건물 하나를 지으려면 모든 다른 건물들과 전기, 상하수도, 개스, 전화, 그리고 인터넷 등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도시 안에서 고립된 건물은 결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랜드스케이프에서 잔디 밭에 누워있을 수도 있고, 시티스케이프를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다른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믿음의 네트워크입니다.

합력하는 믿음이 귀합니다. 홀로 믿는 사람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힘듭니다. 곁에서 기도의 지원사격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에 이르도록 수많은 기도의 후원을 입었습니다. 내가 그 기도의 빚을 다 갚을 수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이처럼 빚진 자의식을 품고 삽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졌습니다.

1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설 수도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집안은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습니다. 본문에 기록한 것처럼, 주님께 나아갈 유일한 길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내리고, 거기서 침상을 달아 내리는 일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지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지붕을 뜯어내야 합니다. 그것도 도움이 없이는 결코 해낼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지붕에서 집안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일이라고 해도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지난 주 신문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도둑질하다가 들켜서 밧줄타고 도망하다가 떨어졌다고 하지 않아요? 이처럼 적어도 삼단계의 작업이 모두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믿음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가 믿기 위해서는 전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쳐 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아무리 읽었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한 것 아닙니까?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사도행전 8:30-31a

그러니까,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믿음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인도자가 있어야 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꾸준히 믿음의 길을 가는 영적 가족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결코 인간적인 네트워킹(net-working)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의 길에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로다!”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는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들이심과, 곧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치료하실 때, 그 한 사람을 따로 떼어놓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면, 오늘 만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때 그의 주변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떠메고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치료하시고는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둔 식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이 병자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보나마나 삶의 모든 부분이 망가져 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멀쩡하게 건강하게 되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죄의 용서도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한 사람만의 경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죄사함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2.

바닷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큰 무리는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상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것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루시는 권세와 능력 때문입니다(참고. 마가복음 1:27). 이런 능력은 군중을 상대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일일이 만나주시는 사랑에서 난 것입니다.

3.

레위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리는 당시에 천대받는 직업인이었습니다. 반민족주의자로 무시당했습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있다는 것은 그가 고독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그의 집을 찾아가 식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위 한 패로 분류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싫어했는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다니!

그러나 주님께서는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바로 이 레위가 마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는 히브리어의 헬라어식 발음인데, 그 히브리어는 마팃트야후로서 그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태와 레위는 다음과 같이 서로 그 이름이 섞여 나옵니다.

마태복음 9:9 마태

마가복음 2:14 레위

누가복음 5:27 레위

본명은 레위였는데, 헬라식으로 마태라고 이름이 불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기자 자신이 이 레위 마태입니다. 거기서는 자기의 이름을 세간에 알려진대로 적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방문 자체가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세리 레위 마태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멘.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써 네트워킹이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보다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바로 여기 사랑의 비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랑도 네트워킹 되지 않은 사랑은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의 네트워킹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바로 여기에서 수평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한일서 4:11-12

수직에서 수평으로!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의 자리, 곧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슬픔과 고독의 자리에 찾아오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죄 사함입니다. 의사가 결코 하지 못하는 것은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죄를 사해주십니다.

부르심은 죄 사함입니다. 세리로 죄인으로 살아가던 레위 마태를 찾아가시고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죄의 자리에 찾아오신 임마누엘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물의 구조는 날과 씨로 되어 있습니다.

날은 경()입니다. 세로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선입니다.

씨는 위()입니다. 가로입니다. 옆에서 옆으로 가는 선입니다.

우리교회 전면은 이처럼 날과 씨로 구성된 네트워킹입니다. 이것을 한국식 창살무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영적인 뜻은 복음의 네트워킹입니다. 여기에서 십자가가 도드라진 양식, 이것이 우리교회의 건축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네트워킹 Newworking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네트워킹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줄과 씨줄처럼 교차하는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엮어 만드시는 사랑의 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13-15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모래알갱이 같은 인간을 하나로 묶는 입니다.

먼저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옴입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은혜입니다.

은혜를 바탕으로 복음전파의 길이 열립니다. 여기서 수평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세기 1:2a

이것은 -SPR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b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께서 -SPR의 세상에 찾아오셨습니다. 거룩하지 않고, 파송된 자리가 없으며, 예배가 없는 불안의 현장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오심으로써 ”(, )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분의 강권하심과, 그분의 부르심으로써!

이렇게 형성된 놀라운 은혜는 그분께서 세리 레위 마태의 집으로 방문하시고 그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하심으로써 극적인 모양이 되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주님께서 레위 마태를 부르셨을 때, 그는 즉각 응답했습니다. 앞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때처럼, 레위 마태는 주님께 응답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어떤 믿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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