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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주일설교#적, 무리, 귀신, 제자#마가 3:1-19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866
  • 15-03-06 19:46

201538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 무리, 귀신, 제자

마가복음 3:1-19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의논하니라.

무리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귀신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제자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메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무리, 귀신, 그리고 제자입니다.

1.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결심한 자들입니다.

2. 무리

저들의 이기적인 관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예수님의 적들의 수중에 조종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변합니다.

3. 귀신

귀신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압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서 2:19

그러나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당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나타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이미잘 알고 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귀신은 언제까지나 예수님의 대적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상대하신 것은 언제나 일정합니다.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선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찬양드릴 목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의 본질은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귀신의 능력을 힘입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 권세를 누리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귀신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귀신의 인정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4. 제자

열 두 명입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주님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한 명은 주님의 참된 교육하심과 성령강림을 받으면서 서서히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로 변화되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심으로써 온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네 그룹 중에 제자들이 특별합니다.

제자들은 들에게서 공격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으로써 핍박을 견딥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때로 그들의 무지함으로써 제자들을 어렵게 합니다. 또한 그들은 적들에게 쉽게 선동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사명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성도가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상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로써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1.

본문을 자세히 읽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은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풍을 맞은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시는지, 여부를 살피기 위해 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병자를 사람들 가운데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 하시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법령이 금하고 있는 기도를 오히려 공개적으로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 평소의 습관을 따라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드렸습니다. 원수들은 몰래 숨어서 지켜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드러나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시기 직전에 적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공격입니다. 제가 이미 얼마 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우선순위선정에 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컴퓨터가 01의 선택을 꾸준히 반복하는 것처럼,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 이것이냐, 저것이냐?” Either Or? 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 둘 중의 하나라면 그 대답은 명약관화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옳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옳음은 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선택해야 할 절대선택입니다.

더욱이 안식일은 언제입니까?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날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면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까? 병자를 회복시켜 주시지 않습니까? 잘못된 길에 들어선 인간을 되돌려 보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옳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정의공의입니다. 공의란,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시간은 거룩한 안식일이요, 장소는 거룩한 회당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주시하면서 함정에 빠드릴 나쁜 생각을 가지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 적들은 정상입니까?

더구나 병들어 고통 하는 자에 대한 아무런 불쌍히 여김도 없이, 단지 예수님을 죽이려는 방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그 병자를 미끼정도로 사용하고 있을 뿐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던져 놓은 미끼 말입니다. 병자에게는 이 얼마나 가련한 일입니까?

그런 것입니다. 적의 본질은 그렇게 악독한 것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예배드리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목적을 품고 악독한 행위를 계속 실시합니다. 이들이 바로 적입니다.

그러므로 적의 정체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활해도 거기 걸려들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강해도 그들의 손에 부서질 염려를 놓아야 합니다.

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상대할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방법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문제는 좋은 질문입니다. 좋은 질문이란, 첫째로,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누가 반대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옳은 일인가가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래서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못하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됩니다. 환란과 핍박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정의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길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사람을 따라 넓은 길 가는 자세가 아닙니다. 유행을 따라 넓은 문으로 몰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2. 무리

무리는 중립입니다. 중립이란 가치중립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가치중립이란 말은 곧 무가치를 말할 뿐입니다. 중립으로서의 무리는 가르쳐야 하고, 이끌어야 하며, 구원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무리를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불쌍히 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이 병자도 그들 무리 중에 있었습니다. 무리를 숫자로 보면 그런 마음이 들지를 않습니다. 하나하나 개개인으로 보십시오. 그들의 눈물과 슬픔, 고통과 고독을 마음에 두십시오.

지난 주중에 한국영화 The Drop Box가 이 지역을 지나갔습니다. 관람 기회를 놓쳤지만,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이를 버리는 부모들을 설득하여 박스를 내다 놓았습니다. 아이를 낳아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화장실, 쓰레기장, 거리, 어떤 집 문 앞. 추운 겨울에는 아기의 생명이 위험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아예 태어나서 피도 물로 씻지 않고 버립니다. 탯줄을 자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숫자로 보면,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은 엄청납니다. 숫자로 말하면, 한국사회는 후진국이요, 한국 부모들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뿐입니다.

그러나 버려지는 아이들을 눈동자를 맞추고 보면, 불쌍한 마음에 도울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살릴까, 죽일까?

이 양자택일 질문이 그 목사님의 일생을 바꾸었습니다. 좋은 질문은 품으면 그것이 사명이 됩니다.

군중을 숫자로 보지 말고, 일대일, 개인으로 분간해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양자택일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까?

자기를 비울까, 자기를 비우지 않을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올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이것 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이처럼 하나님 편과 세상 편, 양자로 구분해 놓고, 그때는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거룩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편에 서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멘.

3. 귀신

귀신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에 충만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악한 영에 붙들리면 우리도 귀신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런 선택이 있습니다.

성령님이냐, 귀신이냐?

하나님의 영이냐, 악한 영이냐?

바로 이런 양자선택의 좋은 질문을 품고, 상대를 분별해 내야 합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귀신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입니다. 그래서 이런 양자선택의 질문이 다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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