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성도를 온전하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교회

3-29 종려주일설교#호산나호산나#마가복음 11:1-25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956
  • 15-03-27 16:30

2015329

금문교회 종려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호산나 호산나

마가복음 11:1-25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기를 풀어서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서,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만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예루살렘에서는 호산나!의 소리가 드높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샌프란시스코는 다른 행사로 다운타운의 길이 막혔습니다. 오늘 교회 나오는 식구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는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고, 맞이해야 합니다. 오늘 샌프란시스코는 이런 세속의 물결이 드높습니다. 그래도 오늘 우리는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해 드리는 종려주일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청유형입니다. 특히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호산나중에서 를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겉옷을 펴 나귀 위에 얹은 제자들이나, 둘러선 사람들 중에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펴거나 나뭇잎을 펼쳐 깔아 놓은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대관식으로 알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도성에 들어가 왕좌에 앉는 의식처럼 인정한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알았다고 해도 그들의 준비는 전혀 형편없는 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겨우 겉옷을 벗었고, 무리들고 겉옷이나 나뭇잎을 설치했습니다. 모두 준비가 없는 행위였고, “즉흥적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평가절하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다른 복음서의 평행구절에서 호산나!” 외치는 무리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칠 것이다!” 하심으로써 저들의 환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저들은 곧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님의 재판 때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부르짖는 폭도로 돌변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이 소리를 높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불완전한 행위입니다.

불완전한 환영을 그래도 인정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거기 어떤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진정성입니까?

탕자의 귀환처럼, 지금 유대인들의 예수님 환영은 사뭇 자기중심적 착오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드리지 못한 채로 귀가한 것처럼, 지금 무리들은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고,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여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리의 진정성은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호산나, 그중에서도 에 있습니다.

호산나!

이는 시편 118편에서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중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그 구원의 약속을 확증해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확실히 불확실하게 믿었고, 그 믿음은 확실히 미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바르게 환영해 드리지 못한 첫번째 크리스마스처럼, 이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결코 제대로 된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확실이 그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구원을 다른 어디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죄악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창조주시오 구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을 영접해 드리는 일 외에 달리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외치며 드리는 기도와 찬양은 당연히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진정성을 논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뽑을 때도 진정성을 논합니다. 이 학생이 다른 모든 학교들 중에서 우리 학교를 지원하는 바른 이유가 무엇이냐? 회사에서 사원을 뽑으 때도 인터뷰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유독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는 동기를 말해 보시오.”

적어도 학생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내놓은 지원동기와, 지원자가 회사 인터뷰에서 제기한 지원동기, 그보다 훨씬 진정성이 없는 것이 오늘 예수님을 환영한 인파의 호산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자기들을 구원하실 거룩한 계획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호산나 외침에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정성을 인정해 주신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이 절박함입니다.

주여,

지금 제가 주님께 왔습니다.

저를 지금 구원해 주시옵소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그 동기는 절박함이었습니다.

이러다가는 굶주려 죽겠구나!

인생은 그 진정성이 순수하지 않습니다. 기도 시간에도 의심하고, 예배 중에도 딴 생각입니다. 찬송을 드리면서도 그 가사 내용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기억하며 드리는 예배가 그처럼 중요한데, 인생은 그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어째서 하나님께서 마치 속으시듯이 예배를 받아주십니까? 긴급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주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시 않으시면 영원히 죽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박합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양 무리였습니다. 목자 잃고 유리하는 양떼였습니다. 이들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물론 대개는 영적인 갈급함보다는 육신의 필요, 즉 병과 배고픔, 정치적 억압, 그런 문제를 더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메시야보다는 저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도자를 더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기적, 그 사랑의 모든 목회활동을 경험하면서도 그 깊디 깊은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 죽을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결코 눈치조차 채지 못했습니다. 단지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을 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준비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예비하셨지만, 놀라운 것은그들이 주님의 예비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나귀를 발견하게 하셨고, 주인에게 말하게 하셨고, 그 나귀를 끌고 오게 하셨습니다. 겉옷을 벗어 깔게 하셨고, 종려나무 잎을 바닥에 깔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엎드려 절 받기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는 주님을 오늘 우리가 만나 뵈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님이시란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만드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이시란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날마다 상실해 가며, 불완전하게 변형시키고 말지만, 주님께서 그 불완전을 완전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을 돌아봅시다.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 없는 것을 확인하시고,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으로 저주하셨습니다. 이튿날 그 나무는 뿌리부터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는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열매 맺을 시기가 아닌데, 그래서 열매가 없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열매없음을 근거로 저주를 하시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은, 열매 맺지 못한 책임을 물으시기 위해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반드시 받을 줄 믿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니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게 된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명령만 유효할 뿐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믿고 구하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주님께 와서 아무것이나 구합니다. 재물을 구하고, 명예룰 구합니다. 거짓된 욕망을 구합니다. 그리고 구했으니 주시겠지!” 그런 착각을 품습니다.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요!

바로 25절을 읽어야 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마가복음 11:25

25절 말씀을 위해 24절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죽음 외에 우리가 바라고 기다릴 열매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보다 훨씬 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닙니까?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용서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

댓글목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