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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주일설교#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 4:35-41

  • 작성자 : pastor
  • 조회 : 8,251
  • 15-04-20 05:36

2015419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딛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아멘.

사도행전 27:25a

바로 이 말씀 앞부분, 즉 사도행전 27:25a는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사도 바울이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이제는 생명의 의지마저 상실한 276명을 향해 선포한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안심하라고 외치는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자를 만났습니다. 두 가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그가 로마 황제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다는 그의 무덤이 아닙니다. 둘째는, 함께 동선한 276명의 생명을 그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선주, 선장, 백부장이 함께 있는 배였지만, 이제부터 실질적으로 죄수 출신인 바울이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을 나는 믿는다, 그런 바울 신앙이었습니다.

오늘은 419 혁명 제55주년 기념일입니다. 자유를 위해 젊은 영혼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어떤 젊은이의 시신을 보고, 청년들이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정의를 위해 나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예수님께서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공포는 내게서 떠나가야 마땅합니다.

1937419, 바로 오늘은 금문교(Golden Gate Bridge) 공사를 마치고 차량이 통과한 날입니다. 금문교는 1933년에 착공했습니다. 같은 해 베이브리지(Bay Bridge)도 착공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토목공사가 시작된 1933년은 FDF (Franklin Roosvelt)가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였습니다. 당시는 미국이 치명적인 불황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습니다. 기업하는 사람들도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나라 전체가 패닉(panic)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 FDR이 취임하면서 한 연설이 유명합니다. 지금도 유투브에서 육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Nothing to fear but fear itself!

FDR이 취임한 지 한 해 지난 1934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왔습니다. 데이비슨산 정상에 31.4m에 달하는 철근-콘크리이트 구조물 십자가가 섰고, 그 점등식에 참석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1907년부터 건축을 시작, 다섯 차례 만에 완공한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곳곳에서, 특히 CCSF에서는 물론 19가를 달리면서 서쪽으로 우뚝 솟은 이 산과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FDR의 신념, 즉 우리가 상대해야 할 원수는 경제가 아니라 두려움 자체라는 것을 깨달은 그 동기를 말합니다. 십자가 신앙입니다.

예배 후 나는 아프리카 르완다 출신 아폴리네리 목사님과 함께 데이비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오후 세시쯤 되었을까요? 나로서는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문 때 놀라움과 감격을 안고 그때 찍은 사진과 감상을 2012년에 쿰란출판사를 통해 낸 SPR828-829 페이지에 실었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스케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그 시각, 그 산을 1997년에 프로포지션 F를 통해 구입허가를 받은 아르메니안 커뮤니티가 1915, 터키에 의해 종족학살 당했던 4월을 기념하는 100주년 기념예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숨이 차서 도착한 때는 학생 합창단의 노래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마침 성경낭독을 시작했는데, 에스겔 37장이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이 들은 것은 어느 골짜기였습니다. 그날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내려다보는 데이비슨산 정상에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뛰고 놀라움과 기쁨에 사무쳤습니다. 곁에 앉은 아폴리네리 목사님은 1994년의 르완다 종족학살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나도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와 그 잔혹한 실상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이어지는 분단의 슬픔을 우리 가족사를 통해 경험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연히 그 자리에서 예배를 집례한 여러 목회자 중 하나와 만났습니다. 운집한 군중이 흩어지는 와중이었는데, 그는 자기가 사용하던 팜플렛을 내게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아르메니안 종족이 학살의 고통을 견디고 일어서서 그들이 낭독한 성경말씀처럼, 마른 뼈들이 능히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므로!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은 패닉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왜 저희들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이 동행중이신 예수님을 바로 보았더라면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계셨고, 다른 배들도 함께 떠났습니다. 멋진 장면이지요. 해는 져서 어두워가는 때,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앞서 가시고, 제자들의 다른 배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낭만적인 순간은 곧 사라졌습니다. “광풍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배를 때렸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습니다. 퍼내고 또 퍼내도 물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배가 물에 잠겨버리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무심.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심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죽을 지경이 되어, 물을 퍼내고 파도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무관심하게 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불평이 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으므로, 그래서 불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소위 카운터 퀘스천”(counter-question)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두 질문은 사실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었더라면 무서워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그렇습니다. 믿음은 나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보고, 상황에 의해 붙들려서, 상황의 위력에 주눅이 들어서 두려움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을 깨뜨리고 떨치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환경을 이겨야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환경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십시오. 환경은 풍랑입니다. 어둠입니다. 배에 파고 들어온 물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이 모든 것과 예수님은 극히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계셨습니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님께서는 평강이 가득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환경이나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선택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환경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환경에 매이느냐? 어찌하여 예수님에 매이지 않느냐?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에 매였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나도 가졌을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이라면, 이 때 잠을 주무실 수 있던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두려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믿음 없는 모습이란, 환경을 통해 예수님을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환경에 마음이 휩쓸려서 주님을 보니, 주님의 주무심이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운 것입니다. 깨워서는, “왜 가만히 계십니까?” 따져 물은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대신, 불평과 불만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중심으로 환경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갈라내셨습니다. 창조 제2일에 물을 수직으로 갈라내셔서 하늘과 바다를 내셨습니다. 창조 제3일이 바다를 수평으로 갈라내셔서 육지와 바다를 내셨습니다. 지금 손바닥만한 갈릴리 호수에 일어나는 파도는 주님께 대하여 소위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먼저 알았더라면 환경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경은 틀림없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환경은 틀림없이 이길 수 있습니다. 환경은 하나님의 손에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물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당한 문제는 그러므로 순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보고, 환경을 나중에 보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 드리고, 환경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일어나는 풍랑을 보고 마음이 빼앗겨 두려움이 휩싸이는 대신, 풍랑이 있는 때,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타듯, 즐기거나, 그런 상황에서 보란 듯이잠을 청해 잘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다면

오늘 제자들은 취침시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취침 시간에, 괜히 잠 안자고 일어나서 물을 퍼낸다,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아우성을 떠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신 것 아닙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이 뜻은, 주님께서 도무지 제자들의 행태를 이해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 이해를 받지 못한다면, 그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해해 주시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던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착각한 경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주님과 동행하고 있으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렵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배에 물이 찬다면 그건 누가 보아도 위기입니다. 그것처럼,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배가, 가정의 배가, 비즈니스의 배가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두렵습니까? 그래서 염려가 됩니까?

왜 주님을 먼저 만나 뵙지 않습니까? 왜 새벽예배에 나오지 않습니까? 왜 수요예배에, 왜 주일예배에 나와 주님을 뵙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그것을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곧 내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주무신다면, 그건 주님께서 여기 이 상황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장 큰 문제는 주님께서 안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상황.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에스겔 1장과 요한계시록 4장은 무섭게 생긴 피조물 네 종류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무서운 모양은, 각각, 사자,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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