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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주일설교#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하라#마가 5:21-43

  • 작성자 : pastor
  • 조회 : 8,352
  • 15-05-01 15:58

201553

금문교회 창립제21주년 감사예배

조은석 목사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는 금문교회 창립 제21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 말씀과 찬양이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신 것이 벌써 21년 전의 일입니다.

처음 우리교회가 버클리 언덕에 세워졌을 때, 그 첫 설교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교회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놀랍습니다. 이단들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거짓 영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어제 Youtube에서 본 영상은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웠습니다. 어떤 한국교회였습니다. 150명 정도가 모인 집회인데, 강사가 말합니다. 귀신이 구역질나게 역사하고 있다고. 그러자 적어도 20여 명이 소리를 지르며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우미들을 동원해서 그들을 강단 위로 올라오게 하고, 본격적으로 귀신축출행위를 시작했습니다. 붙들고 흔들고 소리쳤습니다.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교회가 수도 없이 많으며, 이런 행위가 예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남미 콜롬비아에 가면 찬양 인도자들은 물론 전체 교인들이 어두운 조명 아래 풀어헤친 머리를 흔들며 몇 시간씩 광란의 집회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선교단체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신학적 발상으로 선교행위가 파행으로 치닫는 경우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규모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큰 교회 몇 개가 도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교회들이 건강하게 서로 영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도시의 선교를 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금문교회는 작은 교회지만 말씀 안에서 영적으로 바르게 자리매김한 교회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덕에 높이 선 금문교회는 날마다 거룩(S), 파송(P), 예배안식(R)을 세상에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성경말씀이 가장 중요한 신앙내용이며, 말씀 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묵상합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과 회당장의 죽은 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놀랍게도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회당장의 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도중에 혈루증 앓던 여인 이야기가 끼어들기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 이야기가 마치고 나니 회당장의 딸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지난 주에 설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그 회복된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바다에 몰사한 돼지들, 곧 잃어버린 재산만을 염두에 두고 그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주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에서 내몰고? 이렇게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고향으로 되돌아오셨습니다.

어떤 회당장에게 죽어가던 딸이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주님께 간청을 드렸습니다. 자기의 집에 오셔서 죽어가는 딸을 살려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26절을 보면, 많은 의사들에게 괴로움을 당했고, 가진 돈도 모두 허비했습니다. 어째서 치료하는 의사가 이런 불쌍한 여인을 괴롭게 했습니까? 고치지는 못하고 돈만 요구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의사가 다른 종류의 고통을 안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추측할 뿐입니다.

모든 돈을 허비하고 난 이 여인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데, 그 길은 수많은 인파로 덮였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께 치유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생각해도 주님께서 자기 같은 여자를 돌보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확실히 이는 오해입니다. 주님께서는 한센병(나병) 환자들도 돌보셨고, 죽은 나사로를 찾아 무덤에까지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연히 이 여자도 돌보시고 고쳐주실 것이었지만, 이 여자는 주님께 대하여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의사들에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칠 수도 없으면서 고친다고 이렇게 저렇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를 이미 뼈아프게 겪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고자 하는 열망이 컸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틀림없이 자기를 고치리라는 믿음도 강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자격지심이라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그 즉시 병이 나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하나였습니다.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첫째로, 직접 오셔서 아픈 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시기를 부탁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회당장 같은 사람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오시지 않고도 말씀으로만 하셔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드릴 때 지녔던 믿음이었습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시라는 두 자매의 믿음입니다. 때를 놓치지 않기를 구한 것입니다. 병이 든 것을 고치실 수는 있지만, 일단 죽고 나면 주님께서도 어쩔 수 없으실 것이라는 극히 제한된 믿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이었습니다.

네 번째의 경우가, 오늘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냥 가시던 발걸음을 계속 가시더라도, 자기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주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일부러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셔도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병을 고쳐주시리라는 확신! 이것은 정말 소중한 믿음입니다.

드디어 이 여인이 주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그 여인의 12년 병이 나았습니다! 그 여인은 몸으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 밀치고 당깁니다.

주님께서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렇게 물으신 것은, 주님께서 병 고치시는 능력이 당신에게서 나간 것을 깨달으신 탓이었습니다.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안 그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안심시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딸아, 평안히 갈지어다.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처럼 따뜻하고 자상한 말씀이 또 있을까요! 이 말씀만 들어도 이 여인이 치료 전에 주님께 대하여 가진 생각이 오해였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를 고쳐 주시옵소서! 기도드렸어도, 전혀 물리치지 않고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이미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이야기는 겹치는 부분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아직 그 여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동안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온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앞서 말씀드린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과 유사합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집에서 전갈이 왔을 때 회장장은 두려워했고 믿음을 상실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신 것 아닙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는 언제입니까? “절망의 때입니다. 이미 늦었다고 판단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으시다고 판단할 때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바로 앞서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까? 거라사인의 지역으로 이동하시는 바다 위에서, 저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분명히 그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배에 동승하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현존(presence)이 어떤 안전을 보장해 주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나 안 계시나 똑같았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40b

주님께서는 그 정도로 강도 높게 회당장을 꾸짖지는 않으셨습니다. 대신 명령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는 떠드는 사람들과 울며 심히 통곡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떠들며 우는 것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나무라실 때처럼 어찌하여!” 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들이 떠들며 우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행위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어쩌면 앞선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물으셨을 때, 사람들이 눈빛으로 혹은 이런 저런 표정으로 예수님의 꾸짖으심이 얼토당토 하지 않은 것임을 주장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심으로써, 당신의 꾸짖으심을 뒷받침하신 것이 아닙니까? 자는 아이를 두고 떠들고 우는 것은 전혀 쓸데 없는 일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장을 비웃었습니다. 아니, 잔다고? 이렇게 죽었는데? 죽은 것과 자는 것을 구별도 하지 못해? 떠들던 자들이 비웃음을 날렸습니다. 울던 자들이 울음을 그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아니, 세상에, 죽은 사람을 보고 잔다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비웃는 사람들이란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과 같은 방에 계신 것을 주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다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당신과 함께한 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등 세 명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는 시신을 둔 장소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병풍 뒷켠이겠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현장을 보게 하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세 명의 제자들, ,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달리다굼!”

이것은 헬라어 달리다을 합한 명령문장입니다. 달리다는 소녀야!”라는 호칭입니다. 쿰은 일어나라!”는 명령어입니다. 이들이 합하여, 달리다-!이 되었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소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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