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9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로마서 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시기는 언제입니까?

전쟁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습니다.

인권이 짓밟히고,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언제입니까?

 

잠들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깰 때입니다.

막연히 잘되겠지... 그런 태만이 금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낮이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으면 낮이 그만큼 가까운 법입니다. 언제까지나 밤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으면 밤에 속할 수 없습니다.

밤에 다니더라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밝은 빛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어둠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소속이 다릅니다. 그의 소속은 빛입니다.

 

빛의 갑옷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1-12를 읽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왜요? 구속하시기 위함입니다. 피 흘리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했습니다.

빛의 갑옷을 입은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 같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갑옷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과 행동이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영이 예수님의 영에 인도함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생각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입니다.

문이 돌 때 축을 따라 돌듯이, 우리의 회전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옷 입었을 때에 손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옷으로써 보호 받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둠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어둠의 문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를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복음전도자를 만났습니다.

백인 마을에 들어가서 담임목회를 하는데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미국 사람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다른 종교에 대하여 관용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의 삶이 정상입니까?

그러면 복음은 왜 전합니까?

다들 제대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다양성을 집중하면, 떨다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합니다.

포스트모던. 이 시대에 영웅이 없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목소리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소리를 냅니다.

불안합니다.

이럴 때 “단순”해야 합니다.

 

가정교육은 무엇입니까?

부모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무슨 때문입니까?

정리하기 때문입니다.

다 듣고는, “가장 간단한 해법”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책임”이 없으면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합니다.

부모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낳았으니, 내가 책임진다.

내가 사랑하니 내가 책임진다.

그래서 부모의 해법은 간단합니다.

날이 갈수록 이 간단한 해법을 그리워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녀들이 식탁에서, 혹은 차 안에서 나눈 몇 토막 이야기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이유입니다.

 

지도자는 단순해야 합니다.

공통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카이사르의 코끼리 등 연설은 30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오합지졸을 하나로 묶어 로마 정규 군인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단순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달리 전할 메시지가 없습니다.

 

금문교회는 단순한 교회입니다.

교회 이름도 짧고 단순합니다.

그러나 여기 “해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문화는 존중해야 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문화가 아니면 그 문화는 “수정”되어야 할 문화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는 “어둠”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 어둠의 시대에서 “어둠의 자식”처럼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서로 비판할 일도 없고, 그저 살아남기, 곧 생존이 최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맞습니까?

 

나는 신학대학원에서 “문화와 선교” 과목을 강의했습니다.

내 학생들 자체가 여러 인종이 섞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같은 문화 안에 세대의 차이도 있습니다.

선교의 전략적 차원에서 그런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려하다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목회가 그저 “문화사역”으로 그치고 마는 수가 생깁니다. 이건 안 됩니다.

 

나는 CCSF에서 Multi-Cultural Bible Study를 인도했습니다. 버클리 성경공부 때도 여러 인종이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문화의 차이는

 

문화적 차이를 지나치게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업경영에서도 오히려 “공통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전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인터넷”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공통점이 승부처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 민감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그저 그런 것입니다. 아프리카나 남미나, 세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은 죄를 씻음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듣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문화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문화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문화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문화의 차이는 산일 수도 있고 강일 수도 있습니다. 사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시대, 이 문화는 어둠입니다.

문화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문화를 “극복”해야 합니다.

 

어둠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낮에 속한 사람답게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 술, 노름, 도박, 그런 것은 안 됩니다.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옷은 나를 가려줍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던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나게 합니다.

피 흘림 없이 가죽옷이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없이 예수님으로 옷 입는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옷 입는 것은 “부담”이 아닙니다.

“창피”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랑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선포하는 일에 가장 기쁜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귀한 빛의 옷을 입으면 누가 누구를 빛내는 것입니까?

내가 옷을 빛냅니까, 옷이 나를 빛냅니까?

 

나는 목사가운을 입으면서 이 본문을 의지합니다.

가운 없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1부 예배 때는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다만 내 죄를 가려주시고, 옷 입혀 주신 주님을 늘 기억하면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가운을 입으면

가운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면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이 옷을 입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말씀과 성례를 집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옷”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자랑하십시오.

 

-이 옷을 보세요. 얼마나 귀한지 아십니까?

-참 귀하네요!

-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허물을 가려주신 주님이십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얼 먹으러 가든가, 무얼 보러 가는 일 대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세상은 “경쟁”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신 것은 경쟁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다 주고,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난 열매였습니다.

먼저 달린다고 해서 ‘선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이 세상만 말한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을 봅니다.

영원에서 영원을 보노라면, 이 세상은 “순간”입니다.

순간이 달라야 얼마나 다릅니까?

인간은 거기가 거기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흑인도 백인도, 거기가 거기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모두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모두 천국에 가야 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이런 보편성과 공통성이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할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입니다.

미국도 어둠, 한국도 어둠입니다. 아프리카도 어둠, 멕시코도 어둠입니다.

이 어둠을 비출 빛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편성입니다.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대륙을 가서라도

결국 우리가 선포하고 전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주고 사신 몸입니다.

더럽고 추한 일에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삶을 주장해 주시옵소서.

방탕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으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않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빛의 갑옷을 입게 하옵소서.

악한 영의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빛의 갑옷을 입혀 주시옵소서.

아멘.

 

기도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깨끗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빛의 갑옷을 입게 하옵소서.

십자가 아래 서서 가장 단순하게, 가장 행복하게 살면서

날마다 예수님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