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12,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
- 작성자 :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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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17 01:26
2012년 9월 16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
로마서 14:1-12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에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초등학교 6학년 교실, 30년도 더 지난 옛날이야기입니다. 담임교사는 때가 많은 어떤 개구쟁이 아이의 가슴에 “바보”라고 썼습니다. 그 아이의 회고담입니다. 나이가 60이 다 되었는데, 그는 그때 열두 살 때 기억으로 지금도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나는 바보 아니야?” 이 질문이 온 몸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권면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라도 그는 주인이 계시다. 주인이 따로 계신데 함부로 그분의 종을 비판할 수 있느냐? 그 주인 앞에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러느냐?
또 말합니다. 너도 한 주인의 하인이다. 그 주인께서 네가 비판하며 사는 것을 옳게 보지 않으신다. 더욱이 너와 네가 비판하는 그 사람의 주인은 한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너와 그 사람은 “한 형제”다. 어째서 그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느냐?
먹고 먹지 않는 것은, 레위기 11:1-47과 신명기 14:3-21a 등에 규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성별된 민족입니다. 거룩함을 유지하는 여러 영적 생활 중에 하나가 식생활에도 영적 긴장을 품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식물은 그런 구별조건이 없지만, 생물은 정결하게 구별된 것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생물을 크게 동물, 물고기, 새, 곤충 등 네 가지로 나누고, 각각 정결함의 기준을 두었습니다.
동물 중에서는 되새김질과 쪽발이 조건이었습니다. 물고기는 비늘이 조건이었습니다. 새는 어떤 특정한 조건이 없이 바로 정결한 새의 종류를 열거했습니다. 곤충은 발로 뛰는 것이 정결했습니다.
이런 규정의 근거는 건강이 아닙니다. 제사입니다. 모든 생물 중에 먹을 수 있는 구분이 있고, 모든 먹을 수 있는 중에 제물로 쓸 수 있는 것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거리 구분 근거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향한 발걸음입니다.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사람은 누구나 어떤 동물, 물고기, 새, 곤충이든지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결하고 부정한 규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거룩하게 되고 정결하게 되기 때문에, 동물, 물고기, 새, 곤충에 의해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성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통한 정결케 됨을 믿지 못하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그들이 그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업신여기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약한 자들은 점차로 신앙이 자라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길러내신 방법도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했고, 서로 경쟁했으며, 깎아내렸습니다. 배반했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부활을 경험했으면서도 도망치다가 옛날 갈릴리 바닷가로 다시 나갔습니다. 부르심 이전으로 돌아가 그물을 밤새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시거나 업신여기셨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사랑을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에게 대하여 아무런 할 일이 없습니다. 산 자에 대해서는 정성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믿음을 북돋아 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지금 연약한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정교육이요 이것이 학교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생이 다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는 일 외에 “날의 구분”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에 대하여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으면, 모든 날이 다 “복된 날”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 구원의 기쁨으로 자유하기 전, 구약의 규정에 따른 날들을 지키는 연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유월절이라든가, 칠칠절 같은 날입니다. 또 안식일 같은 날입니다. 그런 날에 얽매이는 자는 약한 자입니다. 오늘도 무슨 흉일 기일 따지는 자는 아무래도 강한 자가 아닙니다. 강한 자는 “언제나” “항상” 일정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영적 태도입니다. 그런데 약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날”이 된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1. 먹는 것과 2. 날을 지키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생물을 다 먹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월절, 칠칠절, 부림절 등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모이고, 언제나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지키는 사람들이어서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채 확신하지 못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비판하거나 함부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자라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14:4a)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남”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주인이신데 누가 감히 그분의 종을 비판합니까?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14:10a-b)
여기서 “하인”이 “형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같은 하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님 아래 우리는 “평등”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그렇게 하셔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나없이 모두 “주님의 하인”이며, 우리끼리는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형제들끼리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믿음이 크고, 어떤 형제는 믿음이 적습니다.
아직도 음식을 가려먹거나 어떤 절기의 날을 더 중히 여기는 자는 “십자가의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음식은 십자가의 보혈 아래 다 좋습니다. 모든 날은 십자가의 보혈 아래 다 귀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가치”와 “구원의 능력”을 이해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통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믿음 없는 자들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불쌍히 여기시고” 가르치시고 깨우치셨습니다.
우리도 비판하는 대신, 가르치고 깨우쳐야 합니다. 교사는 공부 못하는 학생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계속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한국에서도 좋은 교사를 만났습니다. 나는 미국 와서도 좋은 교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내가 모른다고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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