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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주일설교#서머나교회#계시록2:8-11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609
  • 17-01-27 23:47

2017129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서머나교회

요한계시록 2:8-11

8.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두 번째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교회는 환난을 당하여 궁핍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서머나교회가 환난으로 궁핍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판단이 아니라는 말씀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보거나 서머나교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실상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우리교회가 환난으로 궁핍합니까? 아무래도 재정이 어려우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의 실상은 우리가 부요한 교회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의 말이나, 스스로의 판단을 보류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을 여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이치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당시 서머나교회를 비방하던 무리들은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입니다. , 사탄을 숭배하는 무리입니다.

보통 비방을 당하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그 비방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나는 나쁜 사람이야.

비난하는 댓글을 읽다가 스트레스에 빠져 들어가는 이치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판단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 속사람의 판단을 근거로 외부의 비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밀리게 되어, 끝내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나는 건강한데,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디 아픕니까? 얼굴이 창백해요.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말합니다. 서로들 짜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건강 확신은 사라지고 진짜 몸이 아픈 것처럼 느껴지다가, 끝내는 앓아눕습니다.

세 번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도 아니요 자기 자신도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누구라고 하시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신 이래 침묵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귀가 막히고 가슴이 열리지 않아서, 아니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하지 않아서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셨고 지혜자를 파송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여 우리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성경을 두고 하나님의 침묵 운운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누구라고 하시는가?

서머나교회는 지금 예수님의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실상은 너를 핍박하는 자칭 유대인은 사탄의 무리다.

저들이 서머나교회를 궁핍하다고 얕잡아 보는데, 겉모습을 본 것입니다.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스스로를 유대인의 무리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사탄의 앞잡이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지금 서머나교회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곧 닥치게 될 고난에 대하여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고난. 그것은 이미 닥친 고난보다 더 두려움을 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면, 그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 분명합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의 눈치를 보고 감정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태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묻습니다. 장차 고난이 오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제 곧 서머나교회 차례가 분명하고 또 분명한데, 어째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볼지어다. 주님께서는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정확하게 깨닫도록 알려주십니다. 평소에 제자들에게 비유로써 가르쳐 주신 주님 아니십니까? 손에 잡게 해 주시고 밝히 말씀하셔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첫째로. 너희 모두가 옥에 들어가 시험 받을 것이 아니다. 몇 사람이다.

둘째로, 끝도 없는 날 동안 받을 환난이 아니다. 겨우 십일이다.

이 두 가지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려워하는 대신 그 환난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1933년 경제 대공황 중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두려움의 내용을 파악하고 대비하면 두려움을 버릴 수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c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하라! 두려움을 두려워하다가는 죽는다. 죽을 각오를 하고 두려움과 싸워라.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했으니, 그것을 대비하라. 두려움을 향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사명자가 가는 길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있어도 사라집니다. 사명자는 주신 사명을 생각합니다. 다른 어디도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노라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관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명은 어떤 것이든지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생명의 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서 받을 상급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받을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천국에서 받을 영생의 상급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천국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열하일기>의 한 토막입니다. 고미숙-길진숙 등이 번역하고 그린비가 2008년에 펴낸 책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

한 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서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넜지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175)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까닭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 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 (174)

인간만사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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