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주일예배설교#바벨탑#창세기11"1-32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525
- 16-04-01 21:18
2016년 4월 3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바벨탑
창세기 11:1-32
바벨탑 사건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
4. 또 말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그제서야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다.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다.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셈의 족보
10. 셈의 족보는 이렇다: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다.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다.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다.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다.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다.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다.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24.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다.
25.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데라의 족보
27. 데라의 족보는 이렇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다.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다.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다.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였다.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였다.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했다.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 이야기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 등 두 가지가 연합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3-11장에 걸쳐 소개된 네 가지 불순종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창조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아간 인간들 이야기 네 가지를 통해, 인간은 결국 죄인이라 것,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배웁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는, 새로운 인물, 곧 “아브라함”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창세기는 새로운 이야기 덩어리, 곧 “아브라함-이삭-야곱”을 포함하는 “족장사”로 진입하게 됩니다. 족장들은 모두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시작한 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으로 출발”하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가 도착한 땅 가나안에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로써 +SPR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창세기는 창조 이전, 창조, 불순종, 순종 등 네 가지 SPR로 구성되었습니다.
-SPR
+SPR
-SPR
+SPR
창세기 11장은 –SPR이 +SPR로 전환하는 분기점 역할을 맡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써 온 인류는 모두 흩어져, 소통이 불가능한 개개인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 역사의 종말과 같습니다. 누구도 친구가 되지 못하는 때, 사람은 각자 “원수”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새 창조”와 같습니다. 그 인류 중 한 사람, 곧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로써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십니다. 이 새로운 민족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본토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여시는 역사, 곧 “구원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살아나갈 수 있는 소망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날 땅에 모여, 탑을 높이 건설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동의가 이루어지자마자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동의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우리 이름을 내고
2.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첫째로,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자는 기획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드리는 공동체로서의 모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제국을 건설하는 목표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도 아니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예배공동체로서의 모임이 아닌, 순전하게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나라 건설을 목표로 세운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내용과 비교해 봅시다. 이로써 우리는 바벨탑 건설 때 인간이 동의한 동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바벨탑 때 사람들이 동의한 첫 번째 내용은 자기들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보의 두 번째 내용, 곧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바벨탑 때 사람들이 동의한 두 번째 내용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함이었습니다. 흩어지지 말자는 것은 뭉치자는 말이요, 뭉쳐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자는 뜻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첫 번째 내용, 즉 “큰 민족”에 해당됩니다.
이로써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벨탑 사람들이 동의한 목적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정확하게 바뀌어 있습니다.
순서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바벨탑 사람들은 그 목적을 “스스로 쟁취”하려는 것인데,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하나는 스스로 얻자는 것인데 반하여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다림입니다.
같은 음식을 앞에 두고,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음식물, 즉 “탈취물” 같은 생각을 먹는 사람과, 자기는 그 귀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지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사람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같은 음식일지라도.
이로써 오늘 우리는 바벨탑 사건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동기를 간파하셨고,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언어가 혼잡하면 마음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갈리게 되면 “모의”한 것을 제대로 이룰 도리가 없습니다. 언어가 혼잡하여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자,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3-11장 전체를 흐르는 모티브, 곧 하나님께 불순종,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쫓겨남, 예배 없는 불안의 삶 등 –SPR의 모습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끝맺음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사람들의 죄악이 주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죄악의 결과로 결론 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한 사람을 불러내셨습니다. 그 사람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래 알갱이처럼 낱낱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은 저주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심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러 완성되었습니다. 신약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복음 1:1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중간기점에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다윗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막을 옮긴 사람입니다. 법궤가 그 성막 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힘껏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춤을 추었던지 옷이 다 벗겨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예배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성전건물을 완공한 사람은 솔로몬이었지만, 다윗은 그 모든 재료를 다 준비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예배를 위한 모든 제도를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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