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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주일설교#무엇이 보이느냐?#마가 8:1-26

  • 작성자 : pastor
  • 조회 : 8,372
  • 15-06-13 12:30

2015614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무엇이 보이느냐?

마가복음 8:1-26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떠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니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 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22. 벳세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밷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1.

또 한 차례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남들이 못 가지는 것을 주님께서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씨입니다.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먹을 것이 없다. 2. 굶고 가다가는 길에서 기진할 것이다. 3.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다. 이 세 가지는 누구라도 관심만 있으면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알고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고 알 수 있고,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형제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이런 대답을 들을 지도 모릅니다. “그건 나도 압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내 코가 석자입니다. 내가 더 불쌍합니다. 내가 더 배고파요. 나는 지금 남들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주님께서는 스스로 머리 둘 곳이 없는분이셨습니다. 여우나 공중의 새가 오히려 부러운 형편이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께서는 남을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된 목자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남을 먼저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내 문제로 삼고 기도하노라면, 분명히 귀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리어 내 문제를 맡아주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반문합니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이 질문은 불가능을 품고 낸 것입니다. 불가능의 현실에 압도되고 만 사람의 마음입니다. 도대체 이 광야 어디에서 떡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얼마간 얻는다고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배부를 수 있다는 것인가?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불가능성에 오염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카운터 질문(counter-question)을 던지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것은 상황에 오염된 제자들의 질문에 엮이지 않는 주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본래 주님께서는 상황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만드시는 분이시지, 상황에 붙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불가능처럼 보이는 환경으로부터 이끌어내시기 위한 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질문이었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제자들은 이 질문으로써 자기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무리를 보고 그 수에 놀라서 자기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은혜를 잊었더랬는데, 이제 자기들에게 주신 바 은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대답을 드렸습니다. “일곱이로소이다!”

떡이 일곱 개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리를 향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땅에 앉으라!”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앉음새는 그냥 쭈그리고 앉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자리를 잡고 앉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발을 길게 뻗고 팔꿈치로 땅에 기대는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리들은 모두 식사의 자리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 드리신 것입니다. “이것 밖에 없다!”는 불평과 비하면 이 축사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을 허락하셔서 이 많은 사람을 먹게 하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해 드리고 찬양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그 떡이 계속 주님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또 찾아보게 하시니, 작은 생선 두어 마리도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그것도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먹었습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 조각을 거두니 일곱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사람들 수를 세어 보니 사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를 남긴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셨습니다. 다른 관련 성경을 참고해서 말하자면, 거기서 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계속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할 것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칭송과 찬양을 즐기지 않으셨습니다. 흩어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제자들도 덩달아 군중들의 칭송에 한껏 고무되어 인간적인 동기가 새어나올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이끌고 배에 오르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물론 제자들도 무리들로부터 따로 떠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본질적인 동기를 품지 않은 어떤 모임도 흩어 떠나게 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공부, 주님 안에서의 친교(코이노니아)가 아니라면 우리는 흩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달마누다는 마태복음의 관련구절(15:39)에 따르면 마가단입니다. 달리는 마가단, 마게단, 혹은 막달라로도 불렀습니다. 지금 주님의 동선을 보면, 복음을 전하시고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치유하시고 자리를 뜨셨고, 군중을 먹이시고 배를 타셨습니다. 소위 박수 칠 때 떠나라는 격언이 생각날지 모릅니다. 그것보다는 비본질적인 대우를 거절하신 뜻이 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비본질적인 관계형성은 철에 스며드는 이나 바위 틈에 생기는 이끼처럼 무익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과감한 잘라내기가 필요합니다. 영적으로는 거룩의 즉각적인 실천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 않으셨습니까?(마가복음 8:10a).

거기는 놀랍게도 바리새인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을 힐난하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말하자면 여태껏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표적을 땅의 것으로 치부해 버린 교만함이 있습니다. 아니라면 영적인 무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끌어안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음을(마가복음 8:34a). 어쩌면 이 두 상황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두고 무리들은 진정한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 스스로는 사악한 세대였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주님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의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힐난하며 시험했습니다. 목적은 주님을 죽여 제거하려 함입니다. 사랑으로 오신 주님,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까? 주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은 탄식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8:12bc

표적을 이미 보았으면서도 표적을 구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보고도 모른다? 이건 정말 탄식할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없으므로 육신으로 보았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표적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이것은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을 믿는 그 태도입니다.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말씀하신 표적은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표적, 혹은 계속해서 보여주시고 계신, 그리고 앞으로도 보여주실 표적을 말함이 아닙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저들의 눈에 맞는, 저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그런 세속적인 표적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떡을 먹고 주님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진 무리를 떠나 배를 타셨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반대편 자리, 곧 달마누다 지역에서 예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바리새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표적 요구를 거절하시고, 다시 배에 오르셨습니다. 무엇을 배울까요?

거짓된 기대에 부푼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즉시떼어내는 일이 중요하고, 동시에 악한 동기로 힐난하고 시험하며, 인간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이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대신,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일도 동시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지체하지 않고!

3.

건너편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가기를 잊어버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겨우 한 개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왕설래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제자들은 서로 수근거렸습니다. “우리에게 떡이 없다고 저러시는구나!”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떡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떡이 하나밖에 없다고 주님께서 누룩이야기를 내셨겠습니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거짓된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계속 육신의 떡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님께서 이 때 환기시키신 것은, 육신의 떡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많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떡은 결코 우리의 중심 토론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지금 없어도 언제든지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남은 바구니가 얼마였더냐? 주님의 질문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열둘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줄 때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느냐?

재차 물으시는 내용은, 이미 두 차례 발생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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