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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주일설교#예고 1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가 8:27-38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755
  • 15-06-20 13:45

2015621

금문교회 1부예배

조은석 목사

십자가-부활 예고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8:27-38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들이 전한 바,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한 무리들은 틀렸습니다. 주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스비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대답은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따르면 이때 주님께서 이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위 메시야 비밀에 해당하는 침묵명령입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주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무슨 말까지 했는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돌이켜 제자들을 보시고, 그중에 베드로를 주목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기준으로 주님의 일을 막아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속에 있는 사탄을 파악해 아셨습니다. 그 순간 사탄이 베드로의 속으로 파고든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들어와 있는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어서 주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동시에, 주님을 따르는 자는 결코 십자가를 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십자가의 길은 곧 자기희생의 길죽음의 길아닙니까? 그래서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주님을 만류했던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러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살고자 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로 가시지만, 그 길은 오히려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십자가를 지며 자기 생명을 내려놓는 것은 소위 자살충동에 사로잡힌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을 함부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의 중대한 결정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가복음 8:36-37

그러므로 십자가는 결코 자기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자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는 좁은 문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고통의 삶은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 말씀은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심과,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의 길임, 그리고 그 죽음은 오히려 생명의 길임을 나타내심 이후에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8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메시야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이신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길도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주님께서 그를 소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런 말씀을 주시는 주님과 이 말씀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주님께서 그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도록, 오늘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 생명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죽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성령님께서는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이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모든 유대인은 물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처럼 주님의 길을 오해한 나머지 주님께 인간적인 요구를 해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살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죽고자 하는 길이어야 합니다.

넷째로. 이 세상은 음란하고 악합니다. 음란하고 악한 기준을 따라서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여기고, 감사하는 길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은 십자가의 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부끄러운 일이며 어리석습니다.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십자가는 물론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멸시하고 천대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의 기준을 버려야 합니다. 그 길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기쁘고 감사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했거나, 예언자의 하나라고 했더라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께서 가시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개 주님을 알기를, 자기의 필요에 따르기가 십상입니다.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업가나 투자자로 이해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의미에서 권력자로 알 것입니다.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좋은 의사로 알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주님께서 빵을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볼 것입니다. 교육에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께서 교육자로 볼 것입니다. 사실, 지난날의 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진 다양한 기대가, “교회란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의 일, 목회사역의 범위와 내용이 이처럼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직접 반영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사역이, 병을 치료하는 병원사역, 교육하는 학교사역, 식량을 공급하는 사역, 입을 옷을 마련해 주는 사역, 살 집을 마련해 주는 사역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역의 본질인 십자가를 증거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오늘 아프리카를 예로 들면, 당장 마실 물이 없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경우가 많아, 많은 선교사들이 많은 인력과 경비를 들여 샘물을 파서 물을 공급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로부터 파송 받은 제자들이라면 지금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아시아 오지에서 어떤 사역을 어떻게 감당했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 입고 자는 문제, 모두 시급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문제는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근본적이며, 영원한 주제입니다. 사람은 먹어도 죽습니다. 잘 입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좋은 집에 살아도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영생입니다.

아니,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영생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겨우 순간으로 살아가는 법입니다. 순간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인생이란 그것이 시한폭탄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순간에 극단적으로 기뻐하다가, 순간의 조건으로 실망하며, 순간에 따라 좌충우돌하는 인생이라면, 그는 정말 예측이 안 되는 폭발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인생에게 떡을 주고 옷을 입혀주고 좋은 집을 지어주며, 그의 건강보험을 들어 주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주님께서도 입혀주셨고, 주님께서도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셨고, 갇힌 사람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목회사역 중에 이런 일로 혜택 받은 사람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먹이시고 다 입히시고 다 고쳐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육신적으로만 본다면 오늘의 어떤 병원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것입니다. 오늘의 어떤 정치가가 훨씬 더 큰 일을 할 것입니다. 기업인의 노력으로 수십만 명이 먹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는 분명히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한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수제자라는 베드로부터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조롱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다하지 않았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십자가 자체가 믿음의 내용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표적이고,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며, 십자가 자체가 자랑이며 영광인데, 사람들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구하고 바라고 추구한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도전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순수하고 복음으로써,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그분을 보고 알고 있습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관심하시는 것은, 육신의 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가 아니라,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죄사함 받고 영생의 길을 가는, 거룩하고 복된 일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십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아는 일보다 더 급하고 바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하지 말고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누구로 아는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스스로 물어도 대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 질문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는 어떤 분이라고 믿는가? 왜 스스로 묻고 답할 수 없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문자답했고, 그 결과 주님을 배반하고 배척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 정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누구입니까? 누가 예수님께 대하여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을 일컬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 당신 스스로 증인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참고. 사도행전 1:8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증인 노릇을 하겠지만,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후에 가능합니다. 이후에 성령충만하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스스로 낸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렇게 선포해야 옳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바로 여기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가지에 대한 정보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라는 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여쭈는 길,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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