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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 주일설교#십자가 부활 예고 3 어린이#마가 9:30-37

  • 작성자 : pastor
  • 조회 : 8,485
  • 15-07-18 01:46

2015719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십자가-부활 예고 3과 어린이

마가복음 9:30-37

십자가-부활 예고 3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어린이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십자가와 부활 예고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십자가-부활을 거쳐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십자가-부활을 거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서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가 어린아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십자가-부활예고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 차례 계속 반복하신 까닭은 그 일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바로 깨달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고, 감히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께 항거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책망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놓고 주님께 여쭙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주님께서 어린 아이를 그들 앞에 세우신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십자가-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부활을 모르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들의 위상을 높이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주님께서 세 번째로 십자가-부활을 예고하셨는데도, 마치 전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서로 누가 크냐? 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무엇일까요? 왕이 가뭄이 지속되는 나라를 염려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신하들이 감투싸움을 하고 있다면?

마가복음의 초점은 큰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과 함께, 가장 작은 아이도 섬기는 자가 되어, 그 결과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고, 주님을 섬김으로써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크냐?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까? 하는 크고 좋은 질문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20은 오늘 마가복음 본문의 평행구입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려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주님을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장기수 특히 사형수의 자녀들을 돌보는 중국의 어떤 단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는 속담은 참으로 악합니다. 죄는 부모가 지었지 어디 자녀가 지었습니까? 그러므로 부모의 죄를 자녀에게 묻는, 소위 연좌제같은 풍습은 사라져야 할 악습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소중합니다. 어린이 교육이 귀한 사역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어른들이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어린이 사역을 바르게 하는 사람은 소위 눈높이 교육을 이해하고 실천합니다. 아이들 수준으로 스스로 낮추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오늘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보고 배우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천국은 스스로 높이는 자가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낮추는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

바로 여기 빌립보서 2:5-11에 오늘 마가복음 말씀에 대한 하나의 해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항상 주님을 배우고, 주님의 마음을 따르기로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것은, 일종의 비유를 풀어 설명하신 것과 같습니다. 농사나 어업, 상업 등에서 비유를 끌어내어 제자들에게 천국을 가르쳐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어린 아이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그가 큰 자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바에야, 이 세상에서 크고 높은 사람 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봅니다. 세상의 명예를 탐내어, 높은 자리,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런 자세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지난주에 나는 한국의 어떤 인문학 특강을 시청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어떤 대학 총장을 지낸 철학교수가 니체의 권력의 의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니체, 그는 누구입니까?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성경말씀에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정면으로 대결한 어리석은 인생 아닙니까? 그런데 기독교 대학 총장을 지낸 그 사람은 니체의 권력의 의지 분석을 타당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권력의지를 품었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급기야는,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일을, 신에게 항거하는 자유 인간의 쾌거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습니까?

나는 철학자는 물론 세속적인 분야의 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놓고 최소한의 기본이해도 없이 마구잡이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슬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인간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바, 어린 아이 같은 삶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겸손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물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가 다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이미 영악하여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친구를 왕따 시킵니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파리대왕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도 어른들의 세계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제자들 앞에 세우셨으 때는, “어린 아이의 속성 하나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왕에 베풀어 주신 모든 비유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비유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메시지 자체와 오직 하나혹은 소수의 접촉점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불의한 종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그 종이 주인의 재산을 거짓으로 관리한 행위를 들어 주님께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메시지와 그 비유의 접촉점 하나, 그가 불의한 재산을 통해서라도 미래를 준비했다는 데 있습니다. 반면에, 주인은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도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종과 주인은 대비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준비하는 자가 차지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어린 아이를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더욱 더, “진실로주님의 뜻을 풀어 설명해 주신 바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천국은 십자가-부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 되심을 깨닫고, 주님의 뒤를 따라 부활의 은총을 입는 데 있습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2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드러난 제자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입니다. 반면교사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 오히려 역설적인 교훈을 얻음을 의미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풀 수도 있지만, 타산지석은 나와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나 일에서도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주님의 제자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오늘 설교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므로, 타산지석 같은 간접적인 교훈이 아니라 반면교사 같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열심히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장에서 오늘 9장에 이르도록,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주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가 크다고 싸움질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고 계신 주님께서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십자가의 길로 이끄시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난 세월을 돌아봅시다.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습니까? 복음이 선포되고, 많은 양육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세상의 일에 탐닉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것을 더 바라보고 살지 않았나요? 서로 더 큰 자가 되려고 싸움질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 같은 죄인에게 소망은 무엇입니까? 죄의 껍질을 벗어낼 가능성이 스스로에게는 전혀 없는 인생에게?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서 13:23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외친 말씀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호세아서 4:14c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서 6:3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서 6:6

제자들이 이 자리에서 주님께 여쭈었어야 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주님은 누구신지, 주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무엇인지, 그 대답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은 바로 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드러난 세 가지 사역이 좋은 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4:23

주님의 사역 길의 정점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주님께선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서 53:5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성도는 부활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8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읍시다. 십자가는 부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이 세상의 명예를 탐내지 맙시다. 예수님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놀라운 은혜의 길로 나아갑시다.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주님께서 허락하신 바, 참된 성도의 길이 십자가와 부활에 있음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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