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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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주일설교#가정과 어린이#마가 10:1-16

  • 작성자 : pastor
  • 조회 : 8,196
  • 15-07-31 22:27

2015726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가정과 어린이

마가복음 10:1-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그제 금요일 오후는 콜마(Colma)의 싸이프러스 묘지에 갔습니다. 최근에 소천 한 둘째 외숙모의 산소를 방문하여 기도드린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져 가는 오후, 우리 몇 사람은 새로 만든 묘지를 내려다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병원에서 심방한 지 며칠 만에 소천 했는데, 지금은 평토장한 땅 아래 누워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김성진 목사님 처조모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오후 5:00에 추모예배가 열립니다.

이 세상은 모두 떠납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슬픔입니다. 어떤 이는 이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하직합니다.

길고 긴 세월이 분명하지만, 돌아보면 쏘아놓은 화살입니다. 벌써 과녁에 닿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과 어린이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말씀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옮기셔서 유대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이윽고 강 건너 동쪽 지역에 이르셨습니다.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전에 하시던 그대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여 여쭈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것은 Yes, No를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이는 당돌한 질문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어째서 옳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No!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물으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말하자면 모세오경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 대답은 당연히 “No!”입니다. 모세오경은 이혼을 절대로 금하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짝지어 주셨고, 사람은 누구도 이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이것은 웬 말입니까? 모세오경에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했다니?

그들이 근거한 말씀은 신명기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신명기 24:1-3

여기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입니다. 수치 되는 일이란 그가 다른 남자와 관계한 사실입니다. 기뻐하지 않음이란 그가 이미 돌이켰지만 그 과거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입니다. (만일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오히려 돌이키지도 않았을 경우는 여기서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경우 음란한 아내 고멜을 찾아가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런 조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저 이혼 증서를 써서 주기만 하면 누구나 언제나 이혼 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읽은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마가복음 10:5b

신명기 24:1-3절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동기는 인간의 마음이 완악함입니다. 어떤 완악함입니까? 여자가 수치 되는 것이 발견되고 남자가 그를 기뻐하지 않았을 경우에 그를 아무런 살 대책을 세워주지도 않고 거리로 내보내는 완악함 말입니다. 아무리 여자가 이혼 당할 잘못을 저질렀고 남편에게 용서 받을 만하지도 않을 경우라도 이혼 증서를 써서 그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그 완악함이란, 바로 이혼 증서를 그 손에 들리지도 않고 거리로 보내는 행위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왜 그런 행위가 완악함입니까? 여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시집에서 쫓겨날 때 이혼 증서 없이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다른 데 시집 갈 수도 없고, 둘째로 어떤 정상적인 직업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창녀가 되거나 걸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혼 증서를 가졌다면 그 여자는 새로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이혼 증서언급은 하나님께서 완악한 남자들의 손에서 연약한 여자들을 돌보아 주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오. 오늘 예수님 앞에 나타나 주님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묻는 바리새인들은 신명기에서 전제하고 있는 완악한 남자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완악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신명기에 깔린 두 가지 조건,” 여자가 수치되는 일이 드러났을 경우남자가 그것을 기뻐하여 용서하지 않을 경우를 완전히 무시한 채, 그저 이혼 증서의 남발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해석대로라면,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증서를 써서 주기만 하면 여자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못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편의대로 해석하고, 저들의 가증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다니!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말씀을 강론하십니다. 모세가 신명기보다 먼저 기록한 창세기 말씀을 근거로 말씀하십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마가복음 10:6

이것은 창세기 1:27b 말씀의 인용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마가복음 10:7-8b

이것은 창세기 2:24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인용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가복음 10:8b-9

창세기에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하신 말씀을 반복하시고, 예수님의 말씀해석 명령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해석은 명령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것은 조건명령이 아닙니다. 절대명령입니다. 사람의 결혼은 스스로 좋아서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 주심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 명령 순종입니다. 사람이 나누는 것은 명령위반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해석 명령을 듣고 더 이상 주님께 어리석은 질문 드리기를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혼에 관하여는.

집에 계실 때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었습니다. 저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내를 버리는 것이 아내에게 간음을 행함이라니? 이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버렸다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에게 해를 끼쳤다는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음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저 지나쳐 지나가는 것은 그를 돕지 않은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해를 끼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 특별한 상황에 그 시간에 거기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평소에 제가 수차례 말씀드린 것입니다. 어떤 일도 우연이란 없습니다. 내가 안 본다고 그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시한다고 그 일이 잊혀버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해를 가리겠습니까? 손바닥으로?

따라서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그와 상관을 끊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그에게 해를 끼치는 적극적인 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계속 들어 보십시오. 이번에는 여자가 이혼하고 다른 데 시집가는 경우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마가복음 10:12

남자의 경우만 아니라, 여자의 경우도 해당합니다. 남편을 버리는 것은 그와 관계를 끊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그에게 간음죄를 짓는 적극적 죄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혼이 급증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1970년대는 인구 천 명 당 이혼이 0.5명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2000년은 2.5명입니다. 30면 만에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두고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확실히 큰 부담이 될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말씀을 비껴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준엄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들은 이 말씀을 가슴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어서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부모나 친척들이라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마음은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러데 이것 보세요.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무슨 심정입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불의를 넘겨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막다니!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14b

어린 아이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하셨습니다. 이전에도 마가복음 9:33-37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지위경쟁으로 분주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마가복음 9:37

이 말씀으로써 어린 아이-예수님-하나님같은 삼단관계가 성립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바, 주린 자, 목이 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죄수 등과 예수님 당신을 일치시키신 때를 연상하면 여기서 어린 아이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나그네, 고아, 과부, 레위인등을 대표적 사회의 약자로 꼽았습니다. 멸시와 천대 대신 보호와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나타난 어린 아이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천대 받던 그들입니다. 더욱이 지금 주님 앞으로 오는 길을 제자들이 막고 섰습니다. 언제 어른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을 때 제자들이 막은 적이 있습니까? 혈루병 든 자거나, 시각장애인이거나 하는 특정 부정한사람들 외에는? 바로 여기서 제자들의 무지와 완악함이 돋보여 드러난 것입니다. 이혼 증서를 앞세워 이혼을 합리화 하려는 앞선 바리새인들처럼?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예수님을 결국 올가미에 잡아넣으려는 못된 유대인들처럼?

오늘 우리는 제자들을 향하여 분노를 발하신 주님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아서다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0:15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듭니다. 어떻게요? 이 세상에는 마음 둘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어린 아이들을 오늘의 한국이나 미국 등지 선진국에서 발생하는 어린 아이 중심 문화와 떼어 놓고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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