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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 주일설교#바디메오#마가 10:46-52

  • 작성자 : pastor
  • 조회 : 9,275
  • 15-08-22 12:33

2015816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바디메오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갈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들 중에 주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경우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예를 들면, 열 명의 한센인을 고치신 일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만 돌아와 사례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여러 가지 점에서 남달랐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면 그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자기 믿음이 사람들의 질타를 이겼습니다.

네 번째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소원을 물으셨을 때,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뚜렷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 네 가지는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섯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고쳐주셨을 때, 그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길에서!” 그 말은 그가 집에 돌아가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다섯 번째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가 보기를 원했을 때, 그 목적은 주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뵐 때, 우리의 목적을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여 예수님을 뵙자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믿음으로써 주님께 나아갔고, 예수님께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자마자 곧 길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서 작별인사를 하거나, 장사를 치르거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쟁기를 붙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 사건에서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즉각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다가 실족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합니다. 제자들처럼, 부르심 받은 이후에도 배반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처럼,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은 잘못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어떤 길을 걸으신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디매오 신앙은 이렇습니다.

1. “나사렛 예수시라는 소문을 새겨들었습니다.

2. 주님을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정확하게 알고 고백했습니다.

3. 주님께서 지나가실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소리 높여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4. 사람들의 핍박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5. 무엇을 주님께 구할 것인지, 왜 그것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6.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직후, 즉각적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중에 첫 번째 항목을 깊이 묵상합니다.

사람이 듣는 소문 중에 버릴 것이 많습니다. 상업적 목적을 띤 광고 같은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협하는 언설도 그렇습니다. 근거 없는 두려움과 의심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작 새겨듣고 품고 지식의 내용으로 지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지금 곁을 지나가시는 이가 계시다. 그분께서는 나사렛 예수시다!” 이 말은 한 두 사람의 말이었을 수도 있고, 여럿이 반복하여 전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디메오에게 자세히 전한 메시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디메오를 무시했습니다. 그가 소리 높여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소리 내지 말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지나가시는 이가 나사렛 예수님이시라는 메시지는 바디메오가 듣도록 잘 준비된 메시지가 아닙니다. (잘 준비된 메시지란, 그럴듯한 건물에서, 안락한 의자, 조명과 음향장치 등 완벽한 세팅과 함께 전해지는 강의 같은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등록한 사람들에게 겨냥한, 대단히 치밀한 강의계획과 함께 전해진 정보 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바디메오로서는 흘려들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바디메오가 살았던 상황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정보에 대해서도 그랬을 것처럼, 사람들은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적절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디메오는 그 정보를 움켜쥐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님! 그분이라면 일평생 맹인이며 거지로 살아왔던 그에게 소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시라면 바디메오를 영접할 것입니다. 훌륭한 발명가는 누구나 비껴 지나가는 정보라도 놓치지 않는 법입니다. 극도로 궁핍한 사람은 누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인지를 압니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아는 법입니다. 갓난아기는 어머니를 느낌으로 압니다.

이런 점에서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분을 향하여 돌진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디메오의 만남에서, 모든 동기가 바디메오에게만 있었던 것처럼 이해하면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 바디메오가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아니면 소망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 데 있다고 말씀하셨던 주님 아니셨습니까? 영육 간에 주님 아니면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 바디메오를 주님께서 미리 아셨고, 일부러 그 지역을 선택하여 지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이 주님을 깨닫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 이전에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도움을 요청하기 이전에 주님께서 그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셨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바디메오의 믿음을 말하기 전에 그를 찾아오신 주님을 말해야 합니다. 원래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요청 이전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신 사랑의 주님 아니십니까?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년 마태복음 강해 때 이미 소개한 말입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 어미닭과 함께 양쪽에서 알 껍질을 쪼는 행위를 말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도와 교육이 이뤄지게 되는 경우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동시입니다. 묻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바디메오의 접근이 동시적 사건입니까?

사실은 예수님께서 먼저 오신 것입니다. 신학적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홀로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구원뿐입니까? 당신의 창조행위에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하늘을 펼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욥기 38-4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스피치의 중심주제입니다.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계명 중 제1계명의 근거입니다.

그처럼, 바디메오 구원 사건에 있어서, 바디메오의 예수님께 대한 접근은 완전히 이차적이며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구원에 달린(dependent) 문제였습니다.

오늘 바디메오가 그랬다면, 우리에게도 바로 이 점이 지적되고 강조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어떤 행위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오심에 부차적으로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우리는 진토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처럼 소망이 없는 존재인 것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근본은 주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4:10

우리는 본래 사랑을 모르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사랑을 모르던 우리에게 오셔서,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에 관심이 전혀 없던 우리에게,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목숨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 중 어떤 위대한 인물이 있어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려놓았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니, 그저 이론으로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친히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감화 감동하심으로써 그를 성령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 자신의 죄의 본능을 거슬러 이기심을 버리고 온전한 사랑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떤 좋은 열매라도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삶은 사명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수많은 환난핍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조용히 하라!”고 입을 막습니다. 저들 자신이 주님의 길을 바르게 알고 따른다면 마땅히 우리의 길을 인정하고 축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도 천국 길을 가지 않고, 그 문 앞을 가로막고 서서 누구도 거기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등을 야단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천국 길 가는 성도는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겨우 목숨을 빼앗을 뿐인데, 그건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번 죽는 것입니다. 한 번 죽음은 정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뒤에 오는 심판입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핍박이 올 때 도리어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영혼까지 멸하시는 그분 말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디메오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도와주었어야 합니다. 길을 열고, 그가 편안하게 주님께 나아가도록 했어야 합니다. 아니, 먼저는,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그를 초청하시는 길을 편안하도록 도와드렸어야 합니다.

그를 부르라!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달려가서 그를 불러 주님 앞으로 인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디메오의 만남을 방해했습니다. 저들의 이기적인 필요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께로부터 바디메오를 소외시켰고, 바디메오로부터 예수님을 떼어놓았습니다. 이런 나쁜 사람들이 또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시도록 길을 비켜 드려야 합니다.

소망교회 창립 멤머 성도 가정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만나 대화 중에, 자기는 담임목사님과 악수한 지 10년도 넘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했더니, 다른 분들이,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목사님과 악수하고 대화하도록 길을 비켜드리느라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 오늘 본문 중에 나타난 바, 무리들 중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꾸짖었습니다.

잠잠하라!

시끄럽다!

저들은 예수님을 독차지 하려고 힘썼습니다. 예수님을 독차지 한다! 어불성설입니다마는, 저들의 힘쓰는 내용이 그랬습니다. 제자들 같으면, 저들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서 끝내는 주님께서 영광에 이르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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