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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주일설교#죽음의 뜻#마가 6:14-44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921
  • 15-05-16 14:15

2015517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죽음의 뜻

마가복음 6:14-44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을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이라도 내가 주리라, 하고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내게 주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37.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8.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지난 주중에 한국의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세 명이 죽었고 여러 명이 다쳤습니다. 유서와 친구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분석하면, 범인은 자살을 오래전부터 준비했습니다.

몇 달 지났지요? 유럽 상공을 날던 비행기 조종사가 자살비행으로 전원이 사망한 사건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의미가 있는가 하면 나쁜 의미가 있지요. 사람의 일생은 그 의미가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는 세례요한의 죽음 소식입니다.

그는 헤롯의 간음죄를 지적했다가 그의 간부의 질시를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공히 소개된 바,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전체 본문에 근거해서 볼 때 오병이어 사건은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단순히 적은 양의 음식을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사건 이외에 다른 뜻이 있습니까? 세례요한의 죽음과 병렬배치 한 것은 무슨 동기가 있습니까?

주님의 동선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지난 주에 우리는 바다를 건너오셔서 야이로의 딸을 죽음 가운데 살리시고,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고향에 이르러, 복음을 선포하시고 고치셨는데,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복음전파의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을을 옮겨다니면서 계속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급기야는 열 두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여섯 그룹으로 나누어 먼 지방으로 복음전도 여행을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님에 의지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했고,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쳤습니다.

갑자가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의 비참한 마지막 모습을 그렸습니다. 제법 상세한 묘사입니다.

들으십시오. 세례요한은 그 첫 번째 출현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립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병이어입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 중에 그의 죽음이 중심 내용입니다. 그는 헤롯의 손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세례요한, 그는 말씀을 선포한 그대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자였고 그는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당신께서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당신의 몸을 찢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영생의 양식으로 당신 스스로를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를 채웠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죽음 그 자체로 마쳤지만, 주님의 죽으심은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영적 양식입니다. 이와같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질적으로 영적으로 달랐습니다. 세례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마가는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독자들에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을 놓고 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관의 뚜껑을 덮기 전에는 그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놓고 그를 평가하는 것을 Orbitry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님께서 평가하십니다.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 사람은 누구나 심판의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죽음의 뜻은 예수님의 뜻과 대놓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특히 그분의 죽으심과 대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죽음의 뜻을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위해서는 의미 있는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죽음이란 한 결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이 놓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은 불쌍히 여기심이 그 동기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드러내려고 하는 궁극적인 의미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을 주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동선을 추적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보다 빨리 달렸고,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미리 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군중이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도, 그들의 간절함을 헤아리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어디든지 내보내어 무엇이라도 사먹게 하자고 했습니다. 돈을 마련해서 나누어 줄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귀찮으니까, 그들을 지금 여기서 물리쳐 버리는 생각에 사로잡혀, 앞뒤 사정은 전혀 헤아리지도 않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럴 때 내놓는 방법이란 결국 무슨 일을 책임있게 하자는 동기가 아니라, 그저 책임을 벗겠다는 동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한 것이라는 사실만 분명해집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특히 예수님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베드로를 보아도, 전혀 군중을 향한 주님의 생각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통해 당신이 누구이신지,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어디까지 가실 것인지 등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세례요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헤롯은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였다가 이제 헤롯의 아내가 된 그 여자는 더 악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자기의 남편과 시아주머니의 싸움에서 그저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변명을 결코 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싸움을 이 여자 쪽에서 동기유발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어서 세례요한의 쓴 소리를 달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 쓴 소리에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 날이 왔습니다. 이 여자의 딸, , 이 여자가 헤롯과 재혼하기 전에 데리고 온 여자 아이가 헤롯의 생일 날 춤을 추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이 여자가 조종한 것 같습니다. 헤롯이 너무 기쁜 나머지 엄청난 약속을 했습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이런 약속은 일종의 인정된 허풍같은 것이었습니다. 선의로 낸 큰 약속입니다. 그런 것에 대하여 말 그대로 나라의 절반을 달라는 요청은 무리한 것입니다. 그저 감사합니다내지 기쁘게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등으로 응수하고 말면 그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절반을 달라는 것보다 더 놀랍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그 잔치자리에서!

이 일은 헤롯으로서는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다면 벌써 해치웠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는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백성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요새 우리 말로 말하면 대중적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인인 헤롯으로서는 대중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헤롯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고, 세례요한의 지적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행위가 하나님 앞에 죄악이었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점으로 인하여, 헤롯은 결코 세례요한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달랐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라도 세례요한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자의 행복에 세례요한이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나쁜 것도 등급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마음에 두려움과 슬픔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보다 악한 것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동성애 문제를 염려하는 것은 그 행위가 죄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행위 자체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 더 큰 초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헤롯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이 있는데 반하여, 이 여자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사람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발상은 전형적인 죄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헤롯도 결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례요한은 죽었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옥 중에 있을 때, 사람들을 보내 주님께 대하여 여쭌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메시야이신지, 아니면 다른 일을 기다려야 할지. 예수님께서 그에 대하여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의 죽음 후에 내리신 평가입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다른 평가가 곧 내려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세례요한은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왕에게 나가 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온 세상에 대하여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천국을 기다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작습니다.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인정하고 믿고 살아가는 중에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이런 구원받은 자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인 세례요한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나란히 대비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경한 발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스스로의 죽음으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써 구원 얻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세례요한의 죽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원이 필요한 자의 죽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서 망자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장례식은 해당 망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히려 기억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만 아니라, 병들어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죽음으로써 구원의 행위를 이룰 자 없습니다. 아니, 구원은 그만두고 어떤 긍정적인 역사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를 이룬 사람들을 칭찬하고 칭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영적으로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희생은 결코 주님의 희생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평가되고 의미가 부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없습니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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