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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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 주일설교#하나님 vs 가이사#마가 12'13-17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984
  • 15-09-19 00:32


12:13-17


하나님 vs 가이사



2015920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다윗은 친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적의 수도 대단히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중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올가미에 걸리게 하여, 끝내는 죽여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친절하고 존경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내는 꼼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얽어매는 것입니다.

여기서 책잡다는 말은 아그레노(agreno)입니다. 이것은 사냥군이나 어부의 작업에서 비롯했습니다. 구약 헬라어 번역인 LXX는 욥기 10:16, 잠언 5:22, 그리고 호세어 5:2에서 바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니이다.

욥기 10:16

젊은 사자가 짐승을 사냥할 때처럼, 빈틈없고 확실하게 달려들 때입니다. 지금 이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을 파송한 무리들(산헤드린일 것입니다)의 계획과 실행이 그랬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이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직접 나와서 주님께 어떤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가?” 따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요한의 경우를 들어 문제를 피해 가셨습니다. 그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래 준비하고 나서 오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몇 사람이 대표선수로 보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논리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헤롯당은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두 종류의 사람들이 결합되어 철저하게 무장하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자기들이 선생님을 잘 아는데,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대하실 때 외모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실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바리새인적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 자세로 상대를 겨눠보는 자세입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는 논리가 있습니다. 거짓말쟁이가, 자기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했을 때 발생하는 역설입니다. 지금 유대인의 지도자 그룹 산헤드린이 파송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의 아비요, 저들은 사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외식하는 자들이란 겉을 치장하는 자들이니, 속과 겉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을 평가하는 말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warrant)로서 자기들의 질문에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저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예수님 평가에 대한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들은 이미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평가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대답을 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내려는 술책을 부리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선생님에게 묻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한껏 올려놓고는, 그처럼 고귀하신 예수님께 귀한 가르침을 받게 되어 영광이라는, 그런 논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지요? 이건 함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피하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피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쟁점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지혜의 질과 수준의 차이가 분명히 그러나는 대목입니다.) 앞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 앞에서 망신당하고 물러갔지 않았습니까? “어떤 권세로?”라고 물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예각을 피해 가셨습니다. 이번은 달라야 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 질문은 헤롯당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질문이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옭아맬 수 있습니다. 여기 걸리면 틀림없이 결정적인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바로 여기서 끝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질 것입니다. 로마제국 내 수많은 소수민족 중에 유대인들이 가장 민족정신이 강했습니다. 로마제국을 향해 자주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독립정신이 투철한 민족이 볼 때, 로마에 아부하며 세금을 걷어 바치는 세리들이란 짐승보다 못한 존재였습니다. 세리들이 유대인 사회에서 받는 대우는 멸시와 천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그동안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아니, 그저 외면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믿고 따랐던 것을 고려하여 배신감이 극에 달할 것입니다. 로마를 공격하던 그들의 불같은 정의감이 예수님을 살해하고자 달려들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예수님을 제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일에 앞장설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고, 따라서 바쳐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바로 구속할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대역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럴 경우, 로마 당국은 십자가형으로써 반란군 괴수를 다스려왔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하는 예수님을 로마에 고발하면, 순식간에 예수님은 로마 군대에 잡히게 되고, 곧바로 처형되고 말 것입니다. 이야말로 손 안 대고 주님을 제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권세 질문을 받으셨을 때 세례요한의 경우를 들어 피하셨습니다. 이번에도 피하실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3.88g의 은화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했습니다. 데나리온을 가져온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당연히 데나리온에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도 가이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황제는 디베리우스(Caesar Tiberius, AD 14-37)였습니다. 그래서 그 대답은 주님의 예상 그대로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로마의 은전 데나리온에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양각화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그 둘레를 싸고 있습니다. 디베리우스 당시 데나리온은 Ti(berius) Caesar divi Au(gusti) F(ilius) Augustus (Tiberius Augustus Caesar, son of the divine Augustus). 이것은 당대 로마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자명하지요. 새삼스레 물어서야 알 일이 아닙니다. 한국은 오늘날 신사임당과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돈 아닙니까?

바로 여기서 예수님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돈이라면, 그리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돈이라면 그 돈은 가이사에게 주어야 맞다. 그가 주인이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주님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한 것 같습니다. 안 그런가요?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물론, 그들을 파송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눈빛도 빛났을 것입니다.

바로, 걸렸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바로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께 바치라. 이것은 논리 상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제정된 어떤 돈에 하나님의 얼굴이나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있었을까요?

성전세를 내는 돈은 어떤 돈이었습니까? 그것은 세겔이었습니다. 성인이 드리는 성전세는 반세겔이었는데, 2데나리온에 해당했습니다. 세겔에도 하나님의 얼굴이나 하나님의 이름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세를 받을 때, 세속적인 돈을 받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작한 돈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유대인 성전에 주조권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다면 모든 돈은 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지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들고 들어온 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까, 말까?”입니다. 이 질문은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어째서 좋은 질문이 아닌가 하면, 이 질문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을 얽어매려고 기획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덫입니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 덫에 걸리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곧 주님께서 저들의 계략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게 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닙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저들의 계략에 걸려든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인 십자가는 인간적인 동기로 결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 곧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찾아와 덫을 놓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질문을 그대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앞서 권세문제 때 그러셨던 것처럼, 그 질문을 치워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나쁜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쁜 질문은 그대도 대답을 줄 것이 아니라 거부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같은 식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그 어떤 하나를 대답으로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바로 여기서, 주님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대신, 가이사와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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