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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주일설교#서기관 vs 과부#마가 12:35-44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134
  • 15-10-16 23:33

20151018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서기관 vs 과부

마가복음 12:35-44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장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하시니라.

서기관 vs 과부

오늘 본문은 서기관과 과부 사이에 부자가 나옵니다. 그러나 가만 읽으면 서기관은 부자와 동일시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마가복음 12:40a)은 부자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서기관은 높은 자리에 앉아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사회에서 천대 받았습니다.

서기관은 부자들과 한편이 되었습니다. 부자를 변호해 주었습니다. 같은 패거리니까요.

부자는 많은 것을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아주 작은 돈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보다 과부가 더 드렸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부자는 많은 중에 극히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물질사용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점을 특별히 누가복음이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부입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물질을 포함한 피조물을 인간이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26

그러나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욕심을 따라 자연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것은 전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특히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에게 주는 복음이었는데, 로마라는 물질문명에 젖어있는 그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 명령을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우리교회 출신이며 우리가 기도로 후원하고 있는 문은상 목사님이 목회학박사 논문으로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쓴 것이 바로 이 주제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도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마가복음도 로마라는 이방인 도시에 설립된 교회를 위해 주신 복음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부자나 과부, 모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물질을 관리하는 관리인”(steward)입니다. 하나는 많이 맡았고, 다른 하나는 적게 맡았을 뿐입니다. 모든 관리인의 의무는 맡은 모든 것을 주인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이 마땅히 주인과 약속한 열매를 바쳤어야 하는 것처럼, 물질을 맡은 이 부자와 과부는 모두 주인의 뜻에 따라 헌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누가복음 12:44

보십시오. 주님께서 이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과부가 한 일은 그의 생활비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헌금이 바른 헌금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다른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는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긴 가뭄 끝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은 후 아들과 함께 나란히 누워 죽음을 맞이할 도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야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땔감을 줍고 있는데, 엘리야가 말합니다.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열왕기상 17:10c-16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이 과부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곧 밀가루 전부와 기름 전부로 만든 떡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맞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계획한 것이라고, “여행비,” “학비,” “생활비등으로 구분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 모든 계획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25-37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경우, 그는 우선 여행비를 치료비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활비를 다시 치료비로 전환할 준비를 차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참된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1

나는 어머니가 아이들 등록금으로 돼지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개척한 교회 전도사님의 아이들 등록금으로 순식간에 전환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아이들 등록금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합니다. 과연 아버지의 자녀들 모두가 충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모두 드림으로써 모두 얻는 길, 그것이 특별히 누가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물질에 매이지 않고, 자유한 마음으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래로부터 세상 사람들도 저들의 모든 소유물을 자기들 신에 바치는 종교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배를 새로 진수할 때 바다 신에게 바쳤습니다. 집을 새로 지어도 그렇게 했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인데, 택시업을 새로 시작한 이웃이 새 차가 나가기 전에 고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세상 신들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헛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유일한 참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물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다시금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과부는 생활비 전부가 헌금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로써 그 여자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요? 다 드렸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구하는 길 외에 살아갈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런 변화가 이 과부의 새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남은 돈이 헌금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헌금을 드릴 때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 후 그는 변화가 결코 없습니다. 그의 돈 씀씀이도 그대로 할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그는 물질을 사용할 것입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후에도 계속하여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안이숙 여사가 작사한 복음성가를 기억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줍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좁은 이길 진리의 길 주님 가신 그 옛 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 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합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소명 이루소서 만 왕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 백성을 구속하니 참 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이런 절대의존의 신앙은 아름답습니다. 어떤 풍파도 이길 수 있고, 누가 핍박을 한다고 해도 결코 깨뜨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신앙이 가능했습니까? 다 드림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최근에 나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비추어 본 다큐멘터리를 시청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 마을로 들어가서 사역했습니다. 환자들의 환부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았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의 생명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물질만 아니라 자기의 건강, 자기의 목숨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후에 그의 두 아들들이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도, 손양원 목사님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아들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3. 삼남 삼녀 중에서 가장 귀여운 맏아들과 둘째아들을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5. 예수 믿고 와석종신해도 복이라 했는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같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더욱 감사합니다.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써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면서 감사합니다

9.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기도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모든 것을 다 바친 중에, 두 아들들을 하나님 손에 바쳤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내 아버지가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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