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성도를 온전하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교회

1-18 주일설교#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 27:44-56

  • 작성자 : pastor
  • 조회 : 7,758
  • 15-01-17 10:33

2015118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5-6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가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뒤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좁은 문이었습니다.

넓은 문도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십자가를 지지 않는 길, 그것이 모두에게 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박해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던 사람들도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했으니! 세상 모두를 믿게하는 손쉬운 방법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길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그건 누구의 를 이루는 일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의를 이루는 일입니다. 마귀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명령을 순종해서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의 원리가 “0”“1”입니다. 그렇듯이 이 세상은 항상 두 가지의 선택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사항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두 가지로 간단하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키에르케고르처럼, 우리는 늘 이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둘 중에 작은 것, 둘 중에 인기가 없는 것, 둘 중에 월급이 적은 것, 둘 중에 일이 더 힘든 것, 둘 중에 지위가 낮은 것, 그런 것을 선택하면 됩니다. 얼마 전 설교에서 거창고등학교에서 가르친 교훈 중 하나가 둘 중에 낮은 자리로 가라!” 였다는 것을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항상 둘 중에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을 버리지 않는다면, 늘 우리는 마귀의 조종범위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소위 미끼를 던질 때마다 우리는 덥석!” 하고 물어버리는, 대단히 조종하기 쉬운 인간입니다.

허허실실 작전

<삼국지>에서 조조와 유비의 전쟁 이야기가 종종 인구에 회자됩니다. 조조 자신은 대단한 책략가였습니다. 유비는 결코 조조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갈공명 같은 사람입니다. 제갈공명이 늘 조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허허실실 작전을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은 보통 상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적군이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아하, 저건 가짜다!” 이런 보통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실제로 모닥불 연기를 피워올리면서 작전을 했습니다. 소위 한 수가 높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미련한 것입니다.

왜 그런 험한 길을?

왜 그런 고통스러운 길을?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힘보다 낫습니다. 사람은 마귀의 조종을 벗어나기 어려울만큼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진정한 지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온갖 조롱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6시로부터 제9시까지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3시부터 제9시까지,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지난 주 설교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이르신 장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장면, 그리고 전반부 세 시간에 걸쳐 발생한 사건을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그 후반부 세 시간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셔서 가신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말씀순종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따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생명은 그것이 살리는 생명일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생명은 쓸데가 없습니다. 소위 진화론은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가치가 살아남기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진화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틀렸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차례 소리를 높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어떤 이단은 죽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의미를 드러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20d

이 화목사건은 전적으로 새로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성전을 헐라하셨던 주님의 명령대로 성전이 그 안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셨을 때는 히에론이 아니라 나오스입니다. 나오스는 성전의 지성소를 말합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것은 이 휘장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써 지성소가 열리고,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지성소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부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거룩한 성, 즉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자던 모든 성도들이 다 일어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증인들이 일어났습니다.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 즉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이 모든 일, 즉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태복음 27:54b

그렇습니다. 증인 되기로 기대되었던 자들은 다 도망치고, 부인하고, 배반하였으나, 이방인들이 도리어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입니다. 말하자면 돌들이 소리 친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선 사람들의 면모가 보입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들입니다. 갈릴리. 여기는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선지가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한탄하셨던 고향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중요한 시기에,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이들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천대 받고 멸시 당하던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이들의 면모는 이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불분명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청탁드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그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지진바위터짐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배척했던 고향마을 사람들, 특히 여인들이 주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이시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빛을 비춤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끝내 그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당신께서는 좁은 문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또한 분명히 좁은 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육신의 판단과 노력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1. 성경말씀을 진리말씀으로 알게 되고

2.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고

3.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질문은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질문을 모두 버리고,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을까?”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을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보혈 아니고는 씻을 수가 없도록 무겁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라마?

Why?

보통 우리가 이런 종류의 질문을 품는 것은 우리의 를 어느정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왜 이런?”

나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종류의 자기 의가 앞서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라는 질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주님 앞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거기는 십자가 앞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마치 갈릴리 출신의 여인들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온갖 천대와 멸시, 고통을 겪고 달리 갈 데가 없기도 해서 주님께 왔습니다. 주님만 위로가 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이어서 주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나?

, 주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나?

, 주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저토록 고통을 당하셨나?

이런 질문이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셨나?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품고 있는 ?” 종류의 질문들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차라리 버리는 것이 나은 질문들임을 알겠습니다.

욥이 있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친구들이나 엘리후도 결국 침범하지 못한 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댓글목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