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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 주일설교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 20:17-34

  • 작성자 : pastor
  • 조회 : 8,901
  • 14-09-13 12:02

2014914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복음 20:17-34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10:32-34; 18:31-34)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한 어머니의 요구(10:35-45)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시다(10:46-52; 18:35-43)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설교는 세 가지 에피소드가 들어 있습니다.

1. 십자가와 부활 예고

2.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

3. 맹인 두 사람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고를 들은 제자들이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때가 되어서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비하지 못했고, 도망치는 길 외에 달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이미 몇 차례 예고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고를 전혀 깨닫지 못한 증거가 바로 두 번째로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 두 명, 곧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세베대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세베대의 아내로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이 여자가 주님께 왔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절하면서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 아들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아들은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청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를 전혀 잘못 이해한 처사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 가는 길은 고난이지 세상적 영광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길이 무슨 나라를 개국하거나 로마로부터 유대를 독립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개국공신의 반열에 들어 우의정과 좌의정 정도로 높이 올려달라고 미리부탁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그러면 이 어머니의 생각과 아들들의 생각은 서로 같았을까요? 아니면 달랐을까요? 아쉽게도 이들 형제는 자기들 어머니의 생각과 똑같았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사이의 논공행각을 살펴볼 때, 이들은 오히려 어머니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앞세워서 예수님께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 잔은 곧 고난의 잔으로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길인데, 누군들 그 잔을 달게 마시겠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그렇게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실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드린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잔이 아닌데,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들이 이해한 세상에서 얻는 영광의 잔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신다면 마시겠지.

그러나 내 좌우편 앉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과연 야고보와 요한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요한은 제자들 중 가장 나중의 그룹에 속해서 순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했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두 맹인 이야기입니다. 앞서 두 명의 제자들과 이 두 사람의 맹인들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자리를 탐냈습니다. 그러나 여기 맹인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무리가 외쳤습니다. “잠잠하라!”

어쩌면 이 무리중에 제자들,” 특히 세베대의 아들들이 더욱 앞장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들은 세베대의 아들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누구신줄 알았습니다. “주님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의 바람은 이루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그룹 모두 두 명이었습니다. 2:2입니다. 앞선 두 사람들은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청탁드렸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의 두 사람들은 제자들과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방해를 받으면서도 끝내 그 부탁을 주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이 차이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가까이 모시고 살았지만, 소위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몰랐고, 그분께서 가시는 길을 몰랐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길”(요한복음 14)이시므로, 예수님을 모르고는 그분께서 가시는 길을 알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이렇게 기도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소원을 빌지만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럴 경우 그 소원은 수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를 찾아가서 강연을 부탁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교수가 찾아온 학생에게 물을 것입니다. “학생은 나를 아는가?” 당연히 안다고 하겠지요. “어떤 대학 교수님 아니십니까?” 그러면 그 교수가 물을 것입니다. “자네는 내가 쓴 논문이나 책을 읽어 보았는가?” 그럴 때 학생이 안 읽었다고 답한다면, 십중팔구 그 교수는 강연을 거절할 것입니다.

가서 내 글을 읽고 다시 오게. 그때도 내게 청한다면 내가 가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을 모르고 가서 청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필요한 것을 청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주님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 나아가서 내가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응답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은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의 기본 정서(mentality)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들어 드리는 것은 신본주의입니다. 이런 점에서 두 제자들은 인본주의자들이요, 두 맹인들은 신본주의자들입니다.

분명히 맹인들은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반 다른 맹인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주님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안다는 것과 상통합니다. 주님을 아는 순간부터 나의 필요는 곧 주님의 뜻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사람들에게 나를 고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삶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맹인들은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기도는 그러므로 심오한 것입니다. 그저 눈뜨기 원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눈 떠서 주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살겠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치유라는 관점에서 오늘 세 번째 에피소드 본문을 돌아봅니다.

맹인들은 이 고침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들의 바라는 바 치유는 주님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눈을 열어 주님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런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들의 바램은 달랐습니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영적인 동기가 아니라 세속적이었습니다. “높은 자리를 추구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그런 자리를 약속한다면 그를 따라 주님을 떠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을 오늘 우리가 듣습니다. 우리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치유하시면, 주님께서는 그 치유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서 치유를 구한다면, 우리는 각오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맹인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버린 것과 얼마나 대비되는 사건입니까?

사람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누구에게 가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로 간다면 그 소원은 이미우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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