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성도를 온전하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교회

10-5 (수정)주일설교#하나님과 가이사#마태 22:1-22

  • 작성자 : pastor
  • 조회 : 6,903
  • 14-10-03 18:31

2014105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22:1-22

하나님과 가이사

2014105

혼인잔치 비유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하라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 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육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 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하매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과 가이사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 가니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아직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므로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는 계략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을 백성들과 이간시키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나라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성대하게 열려고 기획했다. 그래서 초청장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오기를 싫어했다. 다른 종들을 보내서 그 초청한 사람들을 일일이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밭으로, 사업체로 가고, 나머지는 종들을 잡아 모욕하거나 죽였다.

임금이 노했다.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그리고 종들에게 말했다. “혼인잔치가 준비되었으니, 길거리 사방에서 사람들을 불러오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막론하고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왔다가,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았다. “친구여. 어째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그 사람은 유구무언이었다. 임금이 명령했다. “이 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이 임금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래도 안 온 사람들도 있는데, 거기까지 왔다면 잘 한 것이 아닌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십시오.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예복을 입는 것은 임금에 대한 예의입니다. 임금이, “친구여, 어째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물었을 때,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충분히 예복을 입고 오라는 당부를 들었을 것이고, 원한다면 예복을 갖추어 입고 올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예복 대신 평상복을 입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초청자인 임금을 무시했다는 뜻입니다. 유구무언(speechless)! 자기의 허를 찔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입니다. 회개하는 영입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3:3-5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7-1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야에게 있도다, 하니,

장로 중 하나가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되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7:9, 13-14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19:7-9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4

확실히 이 비유는 예수님 당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시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초청을 받았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르신 이를 정면으로 모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함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놀라운 선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멸시했습니다. 이들의 길은 천국이 아니라 바깥 어두운 곳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던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분노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승부에 돌입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상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까?

사람은 손이나 발로 덫에 걸릴 수 있지만, 말로 걸릴 때가 많습니다. 말로 걸린 덫이 치명적일 때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말로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식민지 통치를 받던 유대인들에게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민족정서로 볼 때 납세는 반민족 행위입니다. 그러나 만일 납세를 거부하면 로마의 공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납세하기는 하지만, 그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입니다. 이들이 제기한 두 가지 대답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덫에 걸리고 맙니다. 그것도 치명적인 덫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이것은 옳은 일입니까? 아니면 옳은 일이 아닙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옳은 일이라고 대답하신다면, 그들은 단번에 예수님을 반민족주의자로 몰아부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반민족주의자로 몰리게 된다면,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서 돌아설 것입니다. 본래 바리새인들이 목적으로 삼았던 바, 예수님과 백성들을 이간시키는 일이 한 번에 성공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백성의 적, 민족의 적이 되고, 백성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룟 유다 같은 이는 첼롯당입니다. 무장폭동을 일으켜 로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옳다고 주장하는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고 나면, 제자들 중에서부터 내분이 생겨나고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떠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해치려고 달려들 것이 명약관화 합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옳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백성들의 손으로 예수님을 처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행위를 옳지 않다고 판단하셨다면 이것 또한 심각한 덫이 되고 맙니다. 반민족주의자로 몰리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로마의 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이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그 지방 출신 세리들을 고용해서 징수하게 했습니다. 로마가 식민지 각 지역을 다스릴 때, 납세를 거부하는 자들을 혹독하게 다뤘습니다. 게다가, 납세거부가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폭동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들어있는 사건입니다. 이럴 경우, 로마는 해당 인물을 잡아 사형시켜 버립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로마의 적이 된다면, 바리새인들은 손 하나 대지 않고 예수님을 제거해 버릴 수 있습니다. 로마인의 손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처형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납세하는 행위를 옳다고도 못하고 그릇되다고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신 것입니다. 만일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한다면? 이것 또한 백성의 지도자로서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기왕에 이런 질문이 나왔으니, 백성들은 예수님의 입장을 듣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을 거부하거나, 이 질문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면, 예수님은 그동안 지녀오셨던 권위를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백성들과 로마 양쪽 모두에게서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적어도 바리새인들에게 당당하게 대하시던 그런 대쪽 같은 태도를 더 이상 견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상천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Show me the coin used for paying tax!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Whose portrait is this? And whose inscrption?

그들의 대답은 오히려 간결했습니다. “가이사입니다.”

주님의 제안이 잇따릅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갖다주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 이 대화의 묘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갖다 주라로 마침표를 찍으셨다면,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세금을 바치라는 말처럼 강력한 반발을 유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써 어떤 민족주의자들도 예수님을 대항하여 설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만일 민족주의 심성을 건드리셨다면 그 사실은 십자가를 앞둔 재판에서 반드시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민족주의자들을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로마를 자극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황제의 상과 글이 들어있는 돈이라면 당시 로마에서 통용되던 모든 공식화폐입니다. 모든 공식화폐로써 세금을 내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를 결코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금을 내라고 교육하신 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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