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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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주일설교 "보혜사 성령님"(요한 14:14-31)

  • 작성자 :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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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0-27 06:54

2013년 10월 27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보혜사 성령님

요한복음 14:14-31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미국 처음 왔을 때 내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그때 Thank you, Yes, No 말고 유일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Long time no see!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셨군요. 모두들 건강하게 다시 만나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4장, 그중에서 14-31절을 본문으로 말씀 전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렇게 시작하는 본문은 오늘의 주제, “보혜사 성령님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이어갑니다.

보혜사 성령님.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영어로 Counselor, 혹은 Paraclete로 번역합니다. 법정 용어인데,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라고 변호하는 변호사입니다. “있었는데, 내가 대신 속하여 감당했다”는 대속자입니다.

헬라어를 읽는 어떤 학자는, “다른” 앞에 쉼표(,)를 붙여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붙으면 “다른”과 “보혜사 성령님”은 동격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다른 보혜사” 그러면 “보혜사”가 “이전에” 또 있었다는 전제가 되니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긴 탓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 그런 쉼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의 보혜사”가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일체로서 격은 다르지만 한분이십니다.

요한복음의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성령님의 하나 되심”이 그 다른 주제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께서 기왕에 하셨던 일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주보 1면을 보십시오. 이 교회 건물은 콜롬비아 보고타의 로스 알페스에 있는 “사랑과은혜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가로 6미터, 세로 12미터의 작은 건물이지만, 그 안에 예배당, 부엌, 그리고 방까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2002년부터 지원하는 개척교회입니다. 2005년에 이 땅을 구입했고, 2008년부터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완공했습니다. 우리교회 건축과 시작도 완공도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교회 건축을 놓고 기도할 때 콜롬비아 교회도 함께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작년에 갔을 때, 교인들이 교회당 바로 곁에 있는 6미터-12미터의 필지를 구입해서 교육관으로 사용할 수 있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올해 가 보니, 이렇게 함석문을 달아 놓은 그 땅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땅값을 물었더니 미국 돈으로 5,700불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가정이 6,000불을 헌금하기로 약정했습니다. 그리고 내년 의료단기선교를 약속했습니다. 다른 내과의사 한분이 더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현재 의사 두 명, 약사 한 명이 약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축을 위해 목수 가정이 기도 중입니다. 예정은 내년 8월 11일(월)부터 16일(토)까지입니다. 신학교는 숙소를 마련해 놓고 음식까지 제공할 예정입니다. 이제 여러분 중에 기도 중에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사 간호사는 물론 망치질, 페인트 모두 필요합니다.

로스 알페스는 보고타에서 한 시간 가까이 더 차를 타고 올라가는 고지대입니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입니다. 본래 보고타가 2,625미터입니다. 참고로 백두산이 2,750미터입니다. 그런데 로스 알페스는 보고타에서 한 시간 더 차로 올라가니까, 백두산보다 한참 더 높은 곳입니다.

여기 우리가 지원하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매달 목회자 생활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년 단기선교와 교육관 건축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이들이 놀이터 시설이 빈약합니다. 위험한 산비탈에서 뛰놉니다. 교육관에서 교육과 놀이가 이뤄지는 것은 큰 일 입니다. 대지구입비를 빼면 300불 남지만, 교육관 건축재료비는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이루어집니다. 아멘신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십니다. 세상에 매여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성령충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충만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법입니다.

물건을 살 때는 내 중심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가게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을 때는 다릅니다. 내 돈 내고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선물을 기다릴 때는 “받을 선물을 예상”하지 말고 주는 사람이 누군지, 그가 나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4-15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관계라는 뜻입니까? 네 돈 내고 와서 무슨 물건이든지 사라! 그런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선물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지 말고, “주실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단순하게 14절만 떼어놓고 “무엇이든지”에 주목하노라면, 우리가 평소에 가진 욕심을 드러내기 십상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획하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말씀드리자!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의 전체 흐름 중에 “주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이 있습니다. “나의 계명”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듣는 자의 구미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순종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오래전에 이미 약속하셨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을 기다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지금 “사랑”을 조건으로 걸고 “명령”하시는 “계명”입니다.

모든 것을 구하라. 다 주겠다.

이렇게 약속하셨지만, 사실 주님께서 “주시려는” 바 “모든 것”은 “이미”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어떤 어른이 “네가 구하는 것은 다 준다! 지구의 절반이라도 다 준다!” 그렇게 큰 소리 치지만, 실제로 그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주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그 어른 생각에, 이것은 너무 귀하고 소중하며, 이 아이에게 더 이상 좋은 것이 따로 없는, 최상의 선물이 있다면, “모든 것을 다 구하라!”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주실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 이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은 너무, 지나치게 자기에 대하여 집중합니다. 자기의 필요와,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감정에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그런 나머니, 정작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신가, 그분은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그분께서는 지금 어떤 선물을 내게 주고자 하시는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이것 보세요. 사람이 왜 죄인입니까? 자기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심지어 하나님과 “담”을 쌓고, 자기의 분노, 자기의 즐거움, 자기의 명예,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소유물, 이런 데 집중하기 때문에 그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죄가 바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라!

-네 몸이 원하는 대로 하라!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

-입고 싶은 것을 입으라!

-가고 싶은 데를 가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가고 싶은 대학을 가라!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극도의 “이기주의”에 탐닉하도록 부추키는 것입니다. 자기 말고 다른 사람, 다른 관계, 다른 모든 것은 관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다 주겠다!”는 음성이 들리자마자,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wish listing”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과 나는 내 돈 내고 내 물건 구입하는 관계가 아니라고. 우리는 아무런 “값”을 치를 수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스스로는 자기 생명도 구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 바로 그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사람에게 이끌려 다니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곧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분은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분은 나에게 무얼 주시려고 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자. 여기 보세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선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이 선물을 염두에 두시고 “무엇이든지 구해라. 다 주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염두에 두신 것, 곧 “보혜사 성령님”을 구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이런 표현이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왕들이 그런 허황된 약속, 부도수표를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정말 나라의 절반을 떼어놓고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정도로 마음을 활짝 열었을 때는 상대방이 마땅히 그의 마음을 알아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에 우선해서 성령님에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1.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말씀을 알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주이심을 성령님 아니고는 우리에게 알려주실 분이 안 계십니다.

2.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힘이 없고 쓰러질 때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부활의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탄식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우리가 “불쌍한 존재”라는 것, 날마다 죽음을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 모르고 착각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우리 속 깊은 것에 통달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이러므로 우리가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소원이기도 해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이기도 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열 가지 스무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다 줄여서 한마디로 하면, “성령충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야 정말로 행복합니다.

보혜사.

보혜사는 누구입니까? 영어로 카운슬러(Counselor)입니다.

우선 카운슬러의 가장 좋은 조건은 카운슬리(counselee)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또 그분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보혜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만 구하면 되는데, 다른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기 계십니까? 그분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그분께서 지금 내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그러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이미” 다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기쁨과 감사로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감사드리고, 영광을 돌려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큰 믿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합니까?

나는 최근에 아이패드를 선물 받았습니다. 아들이 월급 탔다고 모아서 선물했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가장 노력한 것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솟구쳐 오른 것은, “얘야, 나는 네가 선물이다. 네가 나에게 있으니, 그게 전부다. 이게 다 뭐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패드가 기쁜 것이 아니라, 그걸 내게 내미는 아들, 그의 마음이 좋고, 그의 웃음이 좋고, 그의 손길이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복음 7장). 악한 아비가 자식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주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먼저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인생들이 그때 그 “선물”로 오신 주님을 환영해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무시했고 천대했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그 받을 형벌로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고 착각했습니다(이사야 53장). 그래서 마땅히 받을 것을 스스로 받는 줄 알고 조롱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살아야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을 우리는 몰라서는 안됩니다.

둘째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보혜사 성령님도 “아들 하나님”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영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복이 있습니다. 이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탄식함으로써 기도해 주십니다(로마서 8장).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고 믿는 것을 우리도 자동적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는 세상과 함께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성령님께서” “탄식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구하고, 자존심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바로 성령님 당신” 스스로를 우리에게 “선물”로 “은사”로 주시고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4복음서를 통해 보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절제”하시고 “최소한으로 하시면서” 끝내 우리에게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성령님에 감동되신 분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처럼 성령님에 감동되면, 예수님처럼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법,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터득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판이하게 다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이 가까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높은가?”를 따졌고, 주님의 고통을 모른체 하고 배반하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부활의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흩어졌고, 문을 안에서 닫아걸고 숨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갈릴리로 갔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 받았는데 도리어 “물고기 잡으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요한복음 21장).

그런 그들이 “성령님에 감동되자” 크게 달라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히 “불같은 성질”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 대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고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 나사렛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것은 무슨 “변증법” 같습니다.

정.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반.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이 있다.

합. 나사렛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런 배짱과 믿음은 어디서 났습니까?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꼭 열흘 동안 성령님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불같은 것이 내려왔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달라져 버렸습니다!

열흘.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시험기간”으로 요구한 것도 10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열흘이면 정말 긴 세월입니다. 이 시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나는 달라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소중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건강하게 하셨고, 미국에 와 살게 하셨습니다. 결혼하게 하셨고, 가정을 세워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의 인생을 “여태까지처럼” 그렇게 감정을 따라,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삶으로 계속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내일은 “소망”이 없습니다. 달라질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기다려 보아야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처럼 힘든 삶을 살아가십니다. 샌프란시스코 삶이 결코 녹록하지 않은데, 왜 그렇게 고생고생 하면서 여기서 살아가십니까? 성령님에 충만하지 않다면 소망이 없는데?

그러나 이것 보세요. 여러분이 성령님에 충만하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느끼는 것이 달라집니다. 없던 힘이 생겨납니다. 이전에는 겨우겨우 버티던 인생이 이제는 “즐기고” “감사하고” “축복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바로 여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곧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기쁨입니다.

나는 지난 휴가 기간 동안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러다가 휴가 이후 설교를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휴가 이전에는 요한복음 14장 전반부를 두 차례에 걸쳐 설교했고, 이제 후반부를 설교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구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나는 휴가 기간 동안, 내내 성령님의 새술에 취했습니다. 휴가를 멀리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기간 동안 성령님께서 내게 오신 것을 체험하였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내가 간구하지 못하던 것을 성령님께서 간구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은혜와 기쁨에 충만하였습니다.

이제 나의 목회는 “보혜사 성령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목회입니다. 내 설교는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내 기도는 성령님께서 충만하심으로써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제일 잘 안다고요? 그런 말 하는 사람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걸 안다면 인생이 이처럼 힘들었겠습니까? 인생에 슬픔과 눈물, 고통과 절망, 전쟁과 파괴가 가득한데, 그게 바로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습니까?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으면 다 입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은 오늘 내게 무엇을 주고자 하시는지,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 스스로에게 너무 큰 관심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양파와 같아서 껍데기를 까고 또 까도 알맹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니고는 우리의 실체가 되실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인생아, 하나님을 힘써 알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서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인처럼 살면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하신 분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도울 자가 없는가,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가, 날마다 그런 선한 생각에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성령으로써 육신을 이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는 성령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로마서 12:2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낡은 생각을 버리고, 거짓된 자아상을 파괴해 버리고, 자기에게 집중하는 파괴적인 이기심을 잘라내 버리고, 오직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두루마기를 입어야 합니다.

인생은 힘쓴다고 되지 않습니다. 죽을 힘을 다한다고 성취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을 힘입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실패했다면,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승리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에 힘입은 바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신실합니다. 확실합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보혜사란 영어로 “Counselor”입니다. 카운슬러는 카운슬리의 마음을 꿰뚫고 압니다. 아니라면 그는 카운슬러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에 충만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마음이 답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수차례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충만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로 불리던 때, 그는 그의 열심에 사로잡혔으나, “나를 핍박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것입니다.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충만하자마자 사울은 바울로 불리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끄시는대로 그는 어디나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 현재, 미래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바람”과 같은 존재입니다.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크”라고 하는데, 성령, 바람, 숨 등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숨을 받아서 “생령”이 된 우리 인생은 성령님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람의 법칙”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삶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말씀 그대로입니다.

자기의 계획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주님께 여쭙고 여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은 “평강”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1. 권능을 받고

2.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어떤 권능입니까? 성령님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는 권능입니다.

1. 사랑. 믿음-소망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입니다.

2. 희락. 기쁨입니다. 잠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솟아나는, 항상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3. 화평. 평화보다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4. 오래 참음. 원망이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풀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5. 자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6. 양선. 착한 마음입니다.

7. 충성.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8. 온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9. 절제. 셀프 컨트롤입니다. 자동차의 브레이크입니다.

이런 아홉 가지 열매가 “성령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란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 곧 “크리스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이 “성령충만”입니다. 이 얼마나 귀합니다. 어떤 물질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아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주실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다 주겠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바, 바로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정답을 말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이제부터 함께 기도합시다. 오, 보혜사 성령님이시여,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120명처럼, 오늘 금문교회 성도 여러분은 성령님을 구합시다. 이 세상 모든 염려와 근심을 다 던져버리고, 오직 성령님에 충만합시다. 지난날처럼 정욕대로 구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살아갑시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갑시다. 지치고 힘든 인생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허락 하시는 바 독수리가 날개 쳐 올라감 같은 새로운 청춘으로 살아갑시다. 내 기도에서 성령님만 간구 드립시다.

기도

성령 하나님. 오늘 성령님께 의지하며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세상 일에 탐닉했고, 세상의 것을 구한 삶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성령님이시여, 우리를 바람처럼 살게하사,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고 천국소망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성령님에 충만하여, 기쁨이 회복되고, 천국소망이 온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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