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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주일설교 "옥합의 향유" (요한 12:1-11)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558
  • 13-07-13 23:16

2013년 7월 14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옥합의 향유

요한복음 12:1-1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 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요한복음에서 “때”는 중요한 흐름을 제공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이 거의 다 된 시점에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마을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주로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베다니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했습니다.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앉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에 나사로도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아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의 손에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향유는 옥합에 들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모두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털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방안에 향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오랜만에 나타나는 바, 예수님을 바로 이해한 사람입니다. 여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했는지 그 면면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이해했을까요?

바로 앞장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주님께서 일찍 왔더라면 자기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주님께 탄식소리를 낸 그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한 마리아와 완벽하게 상반된 입장에 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 그랬습니다. 그중에 특히 가룟 유다가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왜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가룟 유다는 향유를 보지 않고 돈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돈과 가난한 사람들. 그러나 요한복음서 기자는 분명히 짚어냅니다. 가룟 유다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배를 충족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고 돈궤에서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었습니다.

그런 자가 예수님을 바로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를 그는 돈으로 환산하는 데 빨랐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예수님께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은 것을 비난했습니다. 자기는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으면서!

이것 보십시오.

마리아는 300 데나리온어치를 주님께 부어드린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최선”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다 드리고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의 머릿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향유만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머리털도 드렸습니다. 엎드려 닦았으니 자기의 온 몸을 다 드렸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드렸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부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지금 자기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곧 자기의 부활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 크신 은혜는 한이 없는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 앞에 엎드려 자기의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여자에게 머리털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행위를 “당신의 장례를 준비함”으로 아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고 알았습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상하고 세 가지 예물을 가져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온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향유를 바쳤는데, 그것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한 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다.

이것이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보통 자기의 장례에 대하여 유언합니다.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그의 행위에 대하여 그런 정도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신 뜻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그 의미를 알고 “자기와 관계하여 믿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이해하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은 데서 왔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부활이시고 생명이십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심이며, 죽을 우리를 살리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며, 부활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마리아가 이것을 안 것입니다. 자기의 오라버니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믿은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처럼 마리아 자기도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표현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경우, 그는 그의 믿음을 표현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고백한 이 고백이 마리아의 고백도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말로 했지만 마리아는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오늘 내 죄를 용서하시려고 내게 오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온 세상이 다 주님을 배반하고, 오해하고, 떠나고, 멀리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당신의 주님 되심을 믿습니까?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

마리아의 믿음 없는 것과도 분명 관계가 있었을 그 눈물.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마리아와 관하여 기뻐하십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오해를 잘라내 버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

더 이상 그를 오해하지 말라!

여태까지는 예수님을 오해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리아까지 오해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중에 오해 받습니다.

오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골고다 언덕길.

이 길은 험하고 높습니다.

그냥 걸어도 어렵습니다.

응원을 받으며 걸어도 힘듭니다.

그런데 비난과 욕설, 오해와 비판의 화살을 맞아가면서 걸어 올라야 합니다.

도대체 이 길이 어떤 길입니까?

이타의 길

이웃 사랑의 길

그런데 이런 참 사랑의 길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본래 우리는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희생하면서 묵묵히 걸어가는?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본질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우리에게 낯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주중에 중국교회와 예배, 성도들의 간증을 시청했습니다.

거기는 예배가 살아있습니다.

뜨거운 감동 속에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고단한 신앙생활 중에, 그들은 주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예배의 프로젝터

찬송가와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읽습니다.

프로젝터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성경과 찬송가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연이 살아있고, 감동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일

이것은 마리아에게 “예배”였습니다.

그는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금문교회가 “소금”이며 “빛”이 되는 길을 간절히 구합니다.

그것은 예배가 살아나는 길입니다.

찬송가와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와서

예배 전에 미리 읽고 기도로써 준비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가슴에 떨어지면 받아들이고 믿어

순종하고 순종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이런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책과 찬송가는 우리의 향유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으로 된 찬송을 드립니다.

예배=옥합 깨뜨려 주님께 향유 부어 드리기입니다.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이폰으로 성경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을 때의 “차선”입니다.

그러나 책으로 된 성경을 가슴에 품고 와서 펼쳐 읽으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최선을 주님께 드려야 마땅합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분을 통해서 롱펠로우(Longfellow)의 시를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생찬가”(A Psalm of Life)입니다. 그중에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슬픈 곡조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그저 텅 빈 꿈일 뿐이라고!

아무리 즐거운 것일지라도 미래는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자기의 죽음을 묻어두게 하라.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일어나 행동하라.

우리 안에는 심장이, 머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

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Act, --act in the living Present!

Heart within, and God o'erhead!

내 안에 심장이 있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I will praise the Lord, who counsels me;

even at night my heart instructs me.

시편 16:7

내 머리 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 이것은 “영원”의 증거입니다.

고난과 슬픔 중에도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 안에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을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가난한 자를 핑계 삼아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자는 향유에서 “돈 300 데나리온” 밖에 달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생명”의 참 뜻을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오라버니의 부활을 경험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벌써 죽었을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육체의 죽음만 죽음이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른 병”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

우리를 절망에서 “절대 소망”으로 이끌어내신 우리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경험한, 부활의 증인입니다.

온전한 헌신이 마리아를 살렸습니다. 부활신앙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감추어 둔 것이 자기를 죽인 자가 여럿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성 점령 때 물건 일부를 감추어 장막 아래 두었다가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집안 모두가 돌무더기가 되어 죽었고, 아골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아 아골 골짜기를 가겠다는 것은 헌신이 없는 자리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땅입니다.

롯의 식구는 뒤를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미련을 끊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천추의 한이 되었고 우스갯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은 비참한 일에 휩싸이고 이스라엘의 적인 암몬과 모압의 집안이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집에 숨겨둔 돈 때문에 죽었습니다. 어리석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물질이 존재합니까?

가룟 유다는 결국 은 30냥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말로는 무엇이었습니까?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헌신 없는 자의 말로는 이런 죽음입니다.

반면에, 헌신한 마리아의 삶은 영원히 빛나는 영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평행구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어 전파될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의 헌신이 영원히 기억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소망이 그의 삶에 헌신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셨습니까?

이제는 헌신의 차례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부활의 교회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예수님 당신께서 스스로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은 “부활의 날”입니다.

마리아가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우선 예배에서 이 사랑을 표현합니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시간에 일찍 교회에 나와, 기도로써 예배를 준비합니다.

성경책과 찬송가를 소중하게 들고 나와 미리 본문과 찬송가를 찾아놓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을 읽고, 찬송가를 불러 봅니다.

예배는 준비한 자가 은혜 받습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마리아처럼, 오늘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모두 부어 드립니다. 이런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을 드리는 예배

모두 드리고, 하나도 남기지 않는 예배

이런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삶은 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 죄를 사하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은,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마리아처럼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모든 것을 다 드림이 마땅합니다.

주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신 주님, 저희들도 주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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