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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주일설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 14:1-4)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520
  • 13-08-18 07:58

2013818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의 주제는 하늘에서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십자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심입니다. 이 거룩한 흐름을 따라 예수님의 피로 거룩해진 성도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소망을 품고 살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걱정이 많고 슬픔이 많습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염려가 많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돌아보다 보면 음식 없고 헐벗은 것이 미안하지만, 저들은 가족의 정이 세상 누구보다 큽니다. 나눠 먹고 나눠 입었으니, 그런 경험 없이 각자 먹고 각자 입은 가정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선교는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는 가난을 극복하게 함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품게 함입니다.

이번에는 열세 번째 콜롬비아 교육선교였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21명이었고, 나는 대예언서, 즉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을 강의했습니다.

학생들

학생들 중에는 20일 후에 출산을 앞둔 신혼부부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수강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수업을 받지 못할만큼 아파서 누워있기도 했고, 아들의 근심에 가득한 얼굴로 함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통역자

나와 처음 만난 통역자는 올해 43세였습니다. 성경학교 2년 외에 달리 공부한 일잉 없었지만 교회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전문사역자였습니다. 이렇게 통역을 잘 하는 사람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학력이 아니라 헌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미겔 페르난데스

목요일 오후 8시에, 미겔 페르난데스 목사의 논문심사가 있었습니다. 한시간 반에 걸친 심사 후에 부분수정 통과라는 큰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모두들 감격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미겔 목사는 지난 봄, 우리교회에 한달 여 머물면서 논문을 썼습니다. 지난 종려주일 설교도 했습니다.

이바게

금요일에는 이바게를 들렀습니다. 7년 전에 내 강의 욥기를 수강했던 학생 아리엘이 초청하는 이메일을 보냈었기 때문에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 학교의 교장선생은 이름이 하이메인데, 그도 내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교는 210명이 재학하는 초중고 크리스찬 스쿨인데, 정방형으로 된 건물 내부에 운동장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외곽에 땅이 있지만 주차장으로 개발하려고 기도 중이었습니다. 학교의 청사진을 보니 새로운 건물들이 필요했습니다.

아구아 데 디오스

이바게를 거쳐 아구아 데 디오스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가기 전에 첼리타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미겔 페르난데스 목사의 사모가 병원에 근무하고 있어서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렇지만 네명까지는 면회가 된다고 해서 방향을 잡았습니다. 오후 5시가 넘어 도착했습니다. 선선했습니다.

두 명씩만 면회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미겔 목사와 내가 우선 들어갔습니다.

먼저 첼리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는 잠자고 있었는데, 우리의 기도 소리를 듣고 깼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 시를 읽었다고요? 내 시 중에 공포라는 시를 읽어보았습니까?

내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공포라는 시를 암송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 듣고싶다고 했습니다. 천천히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번져오른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생각으로 내 살던 고향으로를 청했습니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시를 읊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부분에 이르러 기억이 나지 않는지 잠시 멈추었다가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기억이 안 나!” 그러나 다시 기억을 되살려냈고 시 낭송을 끝마쳤습니다.

나는 곤잘레스 모랄레스로 불리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 곤돌라 베야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시를 읊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작곡한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가, 두 손을 들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내가 목소리가 곱지 않다는 이유로 평소에 노래를 하지 않는 것을 후회했습니다. 언제고 노래를 하리라!

이어서 나는 그에게 드림을 청했습니다. 내 아들 명인이가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그 드림이었습니다. 그에게 씨디가 있는가 물었더니 어디 두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미겔 목사에게 씨디를 찾아 노래를 들려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어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스스로 자청해서 들려준 잠 못 이루는 슬픈 밤을 청했습니다. 노래하듯 꿈꾸듯 시를 읊었습니다.

살바히나. 그 뜻을 물었습니다. 번역하면서 여러 자료를 참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물었던 것인데 그가 직접 밝힌 뜻은, 큰 나무 가지 끝에 기생하는 하얀색 식물이었습니다. 역시 내가 추측한 것이 맞았습니다.

미겔 목사가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어깨와 손을 잡고, 자기를 따라하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평안을 비는 기도였습니다. 나도 그를 붙들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한국말로 기도하겠다고 했더니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가 이 세상에 살면서 그를 통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힘과 소망을 얻도록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 모두 천국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말씀묵상

첼리타처럼 그렇게 고통이 큰 사람도 공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신앙이 깊은 사람도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는 <잠 못 이루는 슬픈 밤>을 써서 그 18편의 시를 통해 깊은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그처럼 깊은 신앙인도 죽음이 닥쳤을 때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예수님의 음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 외에 세상 지식을 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복음의 밝은 빛만 증거 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모두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어두웠습니다. 망고나무 그늘에서 예배드리는 제자 에팔도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섯 살쯤 된 아들과 함께 우리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그를 만나고 신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은, 공포를 잊어버리게 하시는 배려가 아닐까? 고통에 사로잡히면 공포가 물러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너무 편하면 아주 작은 사건이나 일에도, 아니 떠오르는 생각 자체에서도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고통이 와도 공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첼리타 할머니가 고통 중에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내가 지금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정말 공포의 공격은 집요하고도 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미겔 목사가 첼리타 할머니의 손과 어깨를 붙들고, 그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대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그가 내 제자라는 것이 크게 기뻤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를 가르쳤으나, 그는 나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후 첼리타는 크게 평안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다시한번 기도해 주고 병실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언제나 그 음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멘.

고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고통을 주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공포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공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으로 평강을 얻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한복음 14:2

사람의 고통은 그 중심에 있을 곳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SPR입니다. 거룩한 성도가(S) 하나님의 집(P)에 갑니다. 거기서 평안(R)을 얻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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