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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 주일설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 14:5-15)

  • 작성자 : pastor
  • 조회 : 9,411
  • 13-08-24 23:06

2013825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5-15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일체의 비결”입니다.

그분은 문제를 풀다가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문제가 풀어야 할 것인지 무시해야 할 것인지, 매달려야 할 일인지 버려야 할 일인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니라면 그분의 “일”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일은 극대화한 일이 아닙니다. 극소화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작은 일을? 이 뜻은 그분께서 얼마나 기다리신 분이신지, 당신을 낮추신 분이신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신 분인지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콜롬비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 사람들과 달라요!

무슨 말인가요?

미국 사람들과 콜롬비아 사람들의 공통점은 잘 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콜롬비아 사람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대합니다. 그 나라에 가 보니 그 차이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그저 하이!” 하는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눈을 마주보면서 관심을 가지고 인사합니다. 친절합니다.

친구들을 대하여 대화할 때도 씨 세뇰!” 하면서 응답합니다. 영어로 예쓰, !” 정도의 뜻입니다. 그만큼 상대를 배려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물론 개인차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큰 그림으로 볼 때, 문화적인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후사가수가 거리를 미겔 페르난데스 목사님의 논문심사를 위해 815, 목요일 저녁 차타고 지나가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양쪽 거리에 수많은 교회가 생겼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피상적이지 않은 관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을 알 때 피상적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본질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하여 어떤 느낌이나 개념을 얻어내고는 그 사람 자체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갓난아이를 목욕시킨 후 물을 버리는 대신 아이를 버리는 것이나,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는 껍데기를 취하고 알맹이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앎은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하는 느낌입니다. 이것은 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지식과 달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학)은 분명해야 합니다. 아는 것 같은데 모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깨달음은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전제 속에 나옵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부지간에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불행입니다.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이것처럼 나쁜 속담은 또 없습니다. 유대인 랍비 힐렐상대를 믿어라. 끝까지 믿어라.” 했습니다. 속을 줄 알면서도 믿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속여도 끝내는 그가 돌아올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힐렐은 너 자신은 믿지 말라. 죽을 때까지 믿지 말라.” 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 이것이 다른 사람을 믿는 믿음의 초석입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바른 앎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바른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이름이 없습니다. No other name!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내가 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에고 에이미! Ego eimi.

그러면 바로 그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선포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스스로를 선포하셨습니다.

에흐예 아쉘 에흐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

바로 여기 에흐예는 히브리어 be 동사 하야에서 난 1인칭 현재형(혹은 미래형)인데, 이것과 여호와가 어근(뿌리)이 같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것은 하나님을 본질로 알 수 있는 선언입니다.

바로 이런 선언처럼 예수님께서 에고 에이미!”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꾸 오해하고 편견을 품습니다. 그래서 에 대하여 여쭙고, “진리에 대하여 묻고, “생명에 대하여 의심합니다.

주님께서

길은 무엇이다.

진리는 어떤 것이다.

생명은 이러하다.

이런 설명을 내리는 대신, “내가 바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다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의 초점은 진리생명에 대한 어떤 설명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정의나 심리학적인 현상설명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의 초점이 있습니다. 대개는 가장 나중에 손대는 부분이 그 초점입니다. 나머지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그림의 순서를 역순으로 그려볼 때, 맨 먼저 눈에 닿는 부분이 초점입니다. 그림은 초점을 보아야 그림을 본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그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어디 예수님께서 어떤 관념을 가르치신 분이십니까? 어떤 종교는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러면 손가락을 뻗은 그 사람과 달은 서로 다른 존재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의 손가락을 가르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어떤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께서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마(Thomas)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것은 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주님께서 직전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하신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하셨고, 이어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쯤하면 주님께서 가시는 길이 천국 길임을 왜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을 알면 그분께서 가시는 길을 자동적으로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비껴가면서 길만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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