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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강단, 시편 22편

  • 작성자 : pastor
  • 조회 : 9,885
  • 13-06-08 08:45

시편 22편


다윗의 시편. 아멜렛시할에 맞춘 노래.

아메렛시할은 '사슴'이라는 곡조입니다. 시편의 사슴은 1. 주님을 간절히 찾는 목마른 사슴, 2. 주님께서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심으로써 높은 데서 주님을 찬양하는 사슴 등으로 묘사됩니다. 시편 22편에도 이 두 가지 모습이 다 들었습니다.


시편 22편은 전체적으로 어둡습니다. 1절 전반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을 때 사용하신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으로, 특히 시편으로 당신의 기도를 삼으신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22편은 특히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내용과 그 배경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원수로 서서 각종 짐승의 모습으로(소, 사자, 개 등) 주님 곁에 둘러싸서 비난하고 비웃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 시편 22편은 "예배"에 모든 초점이 있습니다. 시편의 모든 "원수"들이란 결국 "예배 방해자들"입니다. 만일 기자가 예배를 멈추고 절망하고 말았다면 모든 원수들은 "같은 편"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친구들이 원수로 변한 시점은 욥이 그런 상황에서도 예배드리기를 멈추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 저주하며, 하나님 앞에 살기를 구하는 대신 죽기를 구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욥이 끝까지 예배인간으로 남았을 때, 온 지구는 그를 중심축으로 삼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은 변해도 예배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지구의 중심축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바싹 엎드린 예배인간은 바로 그 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욥의 경우, 그의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그들 사이에 열 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원수 되었던 친구들이 돌아왔습니다. 멀리 떠났던 친척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 모두는 욥과 함께 진정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쫓겨다닐 때 굴에까지 도망쳤습니다. 굴은 막장입니다. 막다른 골목입니다. 더이상 나아갈 곳에 없는 그 자리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발을 가리러 들어왔을 때도 복수의 기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예배인간의 자세입니다.


시편 22편의 핵심은 27절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는 이 말씀에 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 곁에 예배인간으로 남아있는 이상,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올 때 곧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족속이 주님의 앞에 예배드릴 때 그들은 나와 함께 예배드리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22:27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약합니다. 지금 우리는 가난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배인간 우리는 일의 결국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을 것입니다. 예배인간 우리는 모든 떠난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어둡습니다. 목 말라 시냇물을 향하여 달리는 사슴처럼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서 그의 힘이 되셔서, 그의 발을 사슴처럼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하박국 3장).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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