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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5-26 주일설교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요한 8장 1-11)

  • 작성자 :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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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5-25 21:08

2013년 5월 26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삼위일체주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1.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이전에 요한복음 7:45-53을 간단히 묵상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랫 사람들과 대화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여기서 명령대로 “그 사람을 잡아오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랫 사람들이 “그 사람처럼 말한 자가 여태까지 없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한 것입니다.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 주님께서 “권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8-29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힐난했습니다. 그리고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는 자들이다.”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는 저주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 중의 한 사람, 곧 니고데모가 말을 냈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말씀을 듣고 나면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니고데모에게 대답합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비웃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이런 단정은 어디서 났습니까? 성경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성경은 갈릴리에서 이방의 빛이 비친다고 예언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 9:1-2

이 본문은 마태복음 4:15-16에 인용되어, 주님께서 천국복음을 갈릴리에서부터 전파하심을 증거했습니다. 이 증거 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목적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사건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주님께 온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는 근거 중 하나는, 여자가 간음한다면 남자는 어디 갔습니까? 남자는 숨기고 여자만 데려온 동기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여자를 살리시는지, 바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밝히시는지,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가 일체 되시는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성자, 곧 거룩하신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2010년, 아프리카에 처음 갔을 때 첫 번째 주일설교 때 설교한 본문입니다. 임마누엘 사파리라는 학생이 목회하는 교회였습니다. 약 400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나의 우선 관심사는 르완다가 1994년에 내전을 치른 나라라는 것, 그해 100일 동안 무려 백만 명이 넘는 인명이 살해되었다는 것, 살인자들이 이웃집 아저씨와 교사, 심지어 청소년들도 가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해자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일수록 그 충격은 훨씬 깊고 심각합니다. 그 상처는 쉽게 낫지를 않습니다. 분노의 골짜기는 어둡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 “복수”를 외치기 십상입니다. 손에 돌을 들고 일어서기 쉽습니다.

나는 그날 설교에서 그들이 모두 손에 든 돌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땅에 엎드려 글씨를 쓰자고 했습니다. 돌로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맨손으로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전쟁하는 것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홀로 서서 약한 자를 막아서는 예수님께서 진정한 생명을 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손에 돌을 든 사람들. 그들에 비하면 예수님께서는 손에 아무것도 없으셨습니다. 무슨 막대기라도 있었더라면 그 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쓰셨겠지만, 맨손이었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죄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하여 예수님을 덫에 걸고자 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모세와 달리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가 되어 “사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이 말씀하신다면, 그동안 “용서”를 가르치신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정면으로 위배한 경우가 되어 “위선자”로서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난국에서,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이때 무슨 글을 쓰셨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다만, 글씨를 쓰시는 동안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있습니까?

스스로 죄가 없다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홀로 그 여자를 정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으로 여자를 풀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를 정당화시켜주심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 행위를 정당화함이 아닙니다. 용서는 죄의 책임을 그에게 묻지 않음입니다. 그 책임을 스스로 지신 예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르완다는 지금 아프리카 부흥의 젖줄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가장 상처 입은 사람들이 주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스스로 돌아봅니다.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아무런 “무기”도 손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돌을 들고 나선 “무리들”에 비하면 그분께서는 오로지 홀로 가장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무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빈손입니다. 사랑은 사랑 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부정적인 질문을 거부합니다.

죽일까요?

이런 질문은 거부합니다. 대신 “누가 죄가 없는 사람이 있느냐?” “이 여자와 다른 인간이 누구인가?” “하나님 외에 누가 사람을 판단할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 아닌가?” “누가 이 여자를 살릴까?”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인이라도, 현장에서 잡힌 사람일지라도, 그를 살리려는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언제라도 시험에 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명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이 세상은 음란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 이하의 이야기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이 주님께 요구했습니다.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누가 악한지, 누가 음란한지를 따지고 지적하는 데 시간을 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써 죄 사함 받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대신 예수님의 용서와 십자가 사랑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시며, 다시 죄 짓고 와도 또 용서해 주실 것처럼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정죄하지 않고 물러간 것은 저들이 “죄인 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신 것은 주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시지만,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를 행해야 합니다.

첫째로, 최소한의 행위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죄인인 줄 깨닫고 돌을 내려놓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정도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결코 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

둘째로, 최대한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죄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권면하고 돕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기 위함입니다. 나 혼자 잘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영혼구원 곧 “구령사업”에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 여인은 지난 2천년의 역사 중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결코 그 여인보다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고 있는 그 돌을 내려놓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 여인을 용서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손에서 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랑은 빈손입니다.

사랑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손을 내려다보십시오.

얼마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손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손입니까?

사랑은 빈손으로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손은 예수님께서 붙드신 손입니다.

그러므로 이 손으로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데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맨손으로 용서하고 악수하고, 품어주고, 손을 들어 축복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빈손은 아름답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길을 양보한 사람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빈손은 아름답습니다.

무슨 선물을 건네주지 않더라도 진심어린 손을 내밀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정말 풍요로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손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빈손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용서와 화해와 사랑 외에?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참된 사랑과 온전한 용서, 위로와 화해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손에 무엇을 들지 않고도, 오히려 빈손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가난한 저희들이지만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용서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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