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 주일설교 "하나님께 영광을" (요한 9:1-41)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593
- 13-06-15 22:39
2013년 6월 16일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하나님께 영광을: 그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아버지 날입니다.
우리는 2013년 한해 주일설교를 “요한복음 강해”로 정했고, 오늘 본문은 9장 전체에 해당합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날”과 겹치는 관계로 아버지 쪽에 초점을 두고 본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보통 자식의 “팔자”에 대하여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1. 자기 팔자는 자기가 타고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보다는 자기 자신이 운명을 타고난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책임을 면합니다.
2. 부모의 “유전자”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본인은 책임을 면합니다. 소위 “조상 탓”이라는 이론입니다.
3. “가정교육”이라는 이론입니다. 아직도 부모의 책임을 묻고는 있지만, 유전자보다는 “교육” 쪽에 무게를 두는 이론입니다.
4. 학교나 사회의 교육환경이 영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이 잘못되는 것은 “죄”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인과응보”의 이론입니다.
죄가 문제를 낳는다면, 이제는 “누구의 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본인의 죄가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아니면 부모의 죄가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자기의 죄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 큽니다. 구약에도 부모와 자식이 따로 책임을 진다는 말씀이 명백합니다. 예언자들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씹는다고 아들의 이가 시지 않다는 속담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어날 때”부터 난 장애는 경우가 다르다는 상식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아기가 무슨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타고 난 문제는 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책임이 크다는 말입니다. 더더구나 장애인 중에 “시각장애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심각한 장애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 쪽에 무게를 두고 “누구의 죄인가?”를 따지는 논쟁이 발달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경우도 당대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합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거부”하셨습니다. 자기라고 대답하시면 그 사람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동정”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선 세간에 도는 논쟁을 종식시키셨습니다. “이 문제는 ‘죄’ 문제가 아니다. 이 사람도 그 부모도 죄를 따지는 일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 대신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목적, 그 목적을 가지고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자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이 사람의 장애를 발견하는 것은, 그나 그의 부모 중 하나를 지적하여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가 장애자를 보고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연 이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냐?”를 물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이 사람에게서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거룩한 사역”을 지금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도록 이 사건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건강하게 났다가 맹인이 된 사람이라면, 그의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눈이 병들었다가 고침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눈을 떠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고침 받았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 아예 눈으로 무엇을 보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치료하신 방법이 특이합니다. 주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침을 뱉어, 흙을 이겨, 그 덩어리를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가지고 실로암 못으로 가라고 하시고, 거기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과정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히 이것은 주님께서 치료하신 방법입니다. 다른 누가 흉내내어서는 안 될 주님 고유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맨 처음 아담을 만드실 때 진흙을 이기신 것과 비슷합니다. 이 점에서 “치유”는 “새 창조”입니다.
실로암 못으로 보내셨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맹인이 자기 스스로 치료의 방법을 구하다가 실로암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기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셨으니 실로암은 치유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실로암에서 눈을 씻은 행위 그 자체는 치료가 되었습니다. 실로암에서 그는 눈을 떴습니다. 왜요?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은 자리니까요.
오늘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그 자리, 거기서 우리는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사라지고, 우리의 근심이 떠나가고, 질병이 고침받은 자리, 거기는 우리의 영적인 “실로암”입니다. 아멘.
이 사람을 보내신 것은(파송, 공 Placement), 그를 회복하셔서 그에게 사명을 감당케 하시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송을 받은 사람은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건강으로써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질병과 장애를 그대로 두시고도 역사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그의 문제 자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그 장애를 문제로 보았으나, 이제는 그 장애가 ‘도구’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송명희의 뇌성마비나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좋은 예입니다.)
사람들이 둘러싸고 물었습니다. 누구냐? 누가 너를 고쳤느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예수라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가? 반문했습니다. 이런 분쟁 중에 사람들은 병 나은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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