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강단, 시편 30편
- 작성자 : pastor
- 조회 : 17,790
- 13-06-20 01:25
시편 30편
표제: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다윗이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을 낙성(dedication)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의 성전낙성은 "비전"입니다. 그는 준비를 마쳤지만 성전 건축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전을 완공하여 주님께 드리는 낙성가는 그 꿈과 비전을 노래함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다윗이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그를 구원하셔서 원수가 다윗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드리는 것이다. 생각한다. 다윗을 원수의 손에서 이끌어내심은 무슨 뜻인가? 원수의 뜻은 다윗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함이다. 그러나 다윗은 끝내 예배를 드린다. 성전완공을 꿈꾸면서!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고치셨다. 이 고치심은 영과 육 모두를 포함한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2절의 "고치심"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네페쉬) 스올(죽음의 땅)에서 끌어내셨다. 다시 말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를 살려내셔서 무덤으로 가지 않게 하셨다. 여기서 스올은 무덤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1-3절은 다윗의 개인적인 기도와 찬양이었다. 갑자기 4절 때문에 분위기는 "공동체 찬양"이 되었다.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기억"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셨던 그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라!
5. 그의 노염은 잠간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나는 5절을 정말 사랑한다. 어디 나 뿐인가!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대구법이다. 노염 vs 은총, 잠간 vs 평생; 저녁 vs 아침, 울음 깃들임 vs 기쁨 옴. 이런 대구법적 반전은 예배인간이 경험하는 유일무이한 기적이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형통할 때, 곧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다. 다윗이 형통을 세상일 성공으로 이해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우리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 이것은 예배의 기쁨일 때다.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또 다른 대구법이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내가 산처럼 굳게 섰으나, 주님께서 얼굴을 가리셨을 때 내가 근심했다. 생각한다. 언제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셨던가!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그러니까 8-10절이 7절에 근거한 우리 의문의 대답이다. 곧, 언제 하나님께서 다윗을 대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셨던가? 대답은, 그가 무덤에 내려가게 될 때, 곧 진토가 될 수밖에 없도록 쇠약할 때였다. 그러할 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하나님,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서 가리지 마시옵소서.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응답이다. 이것은 "과거형"이다. 과거형은 현재 응답에 대한 강한 표현이다. 주님께서 다윗의 슬픔을 바꾸어 춤이 되게 하셨다. 그의 베옷을 벗겨내시고 기쁨으로 옷 입게(띠를 띠게) 하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원주 하나님께서 결국 다윗의 모든 예배를 받으시고 그 놀라우신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이것은 예배를 받으심이다. 이것은 예배인간이 경험하는 최고의 기쁨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그 응답을 달리 말하면, 다윗이 죽은 자처럼 잠잠하지 않고, 그가 영광 중에 주님께 찬송드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내 영광"이라는 번역은 "영광 중에"가 더 낫다. 본문이 카보드(영광)인 까닭이다. 내 영광으로 번역되려면 카보디여야 한다. 아니면 "내 영혼의" 라는 말이 형용사로 덧붙거나(창세기 49장처럼). 다윗은 자기를 죽음에서 이끌어내시고 그 입술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게 하신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를 드린다. 그러니까 그의 성전 낙성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영원한 감사와 찬양이다.
신학
1-6절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받은 응답 감사다. 그런데 7-10절에서 다시 무응답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11-12절에서 응답을 받고 감사드린다. 하나의 시편 안에 이런 높낮이가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밀은 "라카프"다. 창세기 1:2a와 신명기 32:11b에 사용된 "라카프"는 독수리가 새끼를 날기 훈련시킬 때 사용한 동사다. 우리를 떨어뜨리시고 몸이 땅에 닿기 전에 받아채어 올리시는 반복동작이 쥬님 안에서 우리 영성의 성장과정이다.
적용
금문교회는 2012년 마지막 주일, 예배당 완공예배를 드렸다. 2009년에 이미 감사예배를 드렸지만, 그동안 다른 많은 부분이 추가되었고, 끝내 소방검열까지 마쳤다. 2004년 봄에 시작하여 꼭 9년 반 걸린 대역사였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기쁨과 찬송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음이다. 성전 낙성은 건물완공이 아니다. 성전이 그저 건물이라면 유럽과 미국의 텅텅 비어가는 교회당 건물은 무엇이며 술집과 이슬람에 팔려가는 한때 아름다웠던 그 건축물은 무엇인가! 성전 낙성은 예배다. 예배는 그 실체가 생명이며 기쁨이다. 예배는 그 실체가 찬양이며 감사다. 다윗을 거쳐 솔로몬 때 완성한 그 성전, 다윗이 그토록 보고싶어 했던 그 성전은 오래 가지 않고 파괴되었다. 바벨론의 손으로 무너뜨렸다. 49년 만에 돌아온 포로들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성전재건운동을 일으켰고,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성벽까지 완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무너졌다. 예수님 당시에 보신 그 성전은 책략가 헤롯이 지은 것이었다. 예배를 사랑하던 다윗과 비교하면 헤롯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그 성전건물에 열광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건물은 그저 건물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건물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새로 세워질 교회를 말씀하셨다. 교회는 돌덩어리가 아니다. 교회는 예배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참된 기쁨의 예배다. 오늘 시편 30편을 다시 곱씹어 읽으면서 영원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드리는 것은, 오늘 우리가 무덤에 있지 않고 살아 숨쉬는 까닭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드려야 한다(시편 150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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