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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주일설교, 생명의 부활 (요 5:16-30)

  • 작성자 : pastor
  • 조회 : 5,440
  • 13-04-06 23:13

201347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생명의 부활

요한복음 5:16-30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탕으로 종교가 생긴 것은 철학적종교입니다.

이런 종교는 논리가 정연합니다.

이런 종교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연을 끊습니다.

그들이 볼 때 연이란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노병사, 이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포기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종교는 자연을 배우고, 자연과 함께 사라지기를 가르칩니다.

불교가 가장 대표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잔혹하고 무섭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5%만 보고 자연을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잔인합니다.

그처럼 아름답고 건강하던 어머니를 사정없이 만들고, 돌아가신 어머니 몸속에 구더기가 생기게 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따른다면, 그는 죽이고 파괴하고 해칠 것입니다.

자연은 죽음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생명이 태어나자마자 사화(죽음화)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자연을 극복하고 이기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에 모든 권한을 다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한번 창조해 놓고 자연에 질서를 부여해 놓고는 자기 스스로의 재미에 빠져 인생을 돌아보지 않는 그런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섭하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자연대로라면 사망해야 마땅합니다.

돌보아 줄 일도 없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데, 그 당연한 것이 오히려 잔혹하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 은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써 십자가의 길이 생겨났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한 인생을 보십시오.

그처럼 자기들을 위하여 죽음의 길을 가는 그분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며 채찍질하는 그들! 그들은 정녕 죽어야 마땅한 인생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의 죄를 사하시러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주님을 보십시오.

자연을 거스르고, 순리를 역행하며, 오래 된 질서를 파괴하는 한 분 예수님의 얼굴 아닙니까?

생명의 길은 부활신앙에서 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죽었으면 끝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자를 다시 살려내시기 위해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질서를 파괴하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상식을 파괴하는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그 생명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확실히 자연을 파괴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연의 질서는 그 자체로 선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입니다.

그런 현상에 안주하고, 그 현상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을 교리의 근본을 삼는 종교가 지금 온 세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화형태를 띠고 나타난 것이 뉴에이지입니다.

그들의 음악은 물처럼 흘러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고, 그래서 편안합니다.

그러나 그 음악은 결국 포기순응을 가르칩니다.

늙어지면 죽는 것이니 무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 태어났으면 한번 죽는 것이 당연하니 따로 힘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를 찾아왔습니다. 집안에 사람이 죽어가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했습니다. 마을에 내려가서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는 집에서 공양을 받아오라. 그러면 살려줄 것이다.

그 사람은 헛걸음하고 돌아왔습니다.

부처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니 따로 힘쓰지 말라.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병든 자를 보고 불쌍히여기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죽은 자를 놓고 절망하며 우는 자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죽음은 에 불과했습니다. 깨어 일어나야 하는 잠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나는 오늘 이 소망의 주님을 선포합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창조하여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원주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창조//출애굽 다이내믹스를 나는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한 결 같이 자연을 놓고 이치를 논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없다!”

그러나 욥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생은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난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인생은 날마다 기적이다. 그 기적으로 구원 받은 욥은 자연의 이치에 함몰되어 버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 중에도 욥이 고개를 들어 하나님께 호소 드린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25-26

이것이 영의 원리입니다. 육신으로 지면 죽음 외에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육신을 죽이면 그는 살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요한복음 6:63).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

나는 이 소망의 말씀을 믿습니다. 절망으로 호흡하던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살리시고 나를 죽음의 무덤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고 또 의지합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를 가득 채운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흥청망청 녹아드는 도시의 밤에 거리에 가득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절망의 소식 아닙니까?

다들 좌절하고, 다들 슬퍼하고, 다들 죽음 앞에 무력한 손을 놓고 있는 그런 모습 아닙니까?

그래서 포기하는 소리가 하늘에 높고, 그래서 슬퍼 울부짖는 소리가 온 땅에 메아리 되어 땅끝까지 달려가고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가면서 울려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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