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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주일예배 "그는 흥하여야" (요 3:22-36)

  • 작성자 : pastor
  • 조회 : 6,116
  • 13-03-02 22:34

201333

금문교회 주일예배

조은석 목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요한복음 3:22-36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오늘 본문은 두 장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고,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이 정결예식, 곧 세례에 대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점점 세례요한 쪽의 사람들이 수가 줄고 예수님 쪽의 사람들이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이 증언하던 그분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시니, 사람들이 모두 다 그리로 갑니다.” 말하자면 세례요한 쪽에 사람이 줄어들어 그의 제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어쩌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대답이 심각합니다.

1.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저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요, 저분께서 베푸시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세례다. 그러니 나와 내가 베푸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2.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고, 도리어 그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언했다. 이제부터 너희가 그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

3. 신부와 결혼하는 자는 신랑 아니냐? 기다리고 서서 신랑의 소리를 듣는 친구는 크게 기쁜 법이다. 나는 이런 기쁨에 충만하다. , 나는 신랑이 아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다. 신랑이 신부와 결혼하는 것을 보는 기쁨으로 나는 만족한다.

4.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 첫 번째 장면에서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와서 예수님이 크게 부흥하는 것을 보고 불평과 두려움으로 보고하는 제자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여기서 크게 주목할 것은, 그는 스스로가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흥하는 것은 당연하고, 나는 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 교회에 배달된 기독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박장원 목사님의 아들이 의사였습니다. 39세 때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도원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학교에 곧바로 들어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기도원에서 아내와 함께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산으로 오래 난 자동차 길이 눈에 선합니다.

박장원 목사의 부친 박 목사님은 손자 목사에게 이런 유언을 했습니다.

1.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라.

2.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

3. 변명하지 말라.

4. 가장 낮은 곳에서 섬겨라.

이것은 단순히 머리에서 난 사상이 아닙니다. 진실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한 주님의 종들의 모습이 스케치 된 것입니다.

2009년 임화식 목사님의 안내로 아내와 명인이, 그리고 내가 순천과 여수를 방문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과 여수 애양원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설교했던 예배당을 돌아보았고, 목양실에서 현재 담임목사님과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손양원 목사(孫良源, 1902~1950)님은 이상의 네 가지를 모두 지켰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경남 함안군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궁성요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서울 중동중학교 시절에 부친이 3·1운동에 가담하여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선교사의 주선으로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로 시무하였습니다.

그 후 평양신학교를 1938년에 졸업하고 여수 애양원(愛養院)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1940925일 수감되어 여수교도소, 광주교도소, 청주교도소 등에서 옥중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어 출옥했습니다.

그러나 19481021일 공산당이 여수, 순천지역을 지배하면서 동인(東印), 동신(東信) 두 아들은 목사의 아들이요 예수쟁이라는 구실로 납치해 빨갱이들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후에 두 아들을 죽인 학생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손 목사님은 이 젊은이의 구명 운동을 했습니다. 그를 양아들로 입적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부산 고려고등성경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 부모에게 전도했습니다.

1950, 6·25사변 때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을 지키다가 913일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628일 어느 과수원에서 총살 순교를 당했다.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사랑의 원자탄이란 제목으로 안용준 목사가 저술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영국에서 씨앗은 죽어도라고 번역하여 널리 알려졌다.

손양원 목사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한지 60주년이 되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다. 나환자들을 위하여 목회를 하셨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 아들로 삼았으며, 그리고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셨다.

이하는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의 글입니다.

눈물

지난 달 우리 교회에서 결혼한 새 가정 가운데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종손녀가 있었습니다. 이 신부의 큰할아버지께서 손양원 목사님이시고 아버지는 손동아 목사님이십니다. 결혼식 전 손동아 목사님과 신부와 제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진한 향기가 풍기는 감동적이고 잊혀지지 않을 미담을 소개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한국은 좌익과 우익이 나뉘어 온통 나라가 들끓는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여수반란 사건 때에 좌익 학생들에게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때 좌익 학생들은 두 아들을 한 방의 총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못이 박힌 몽둥이로 때려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두 아들을 무참히 죽인 좌익 학생들은 체포되었고 큰아들 동인과 또래인 주동인물 안재선도 체포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당신의 두 아들이 순교 당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좌익 학생 안재선을 만나 전도하였고 그를 죽은 아들들 대신 입양하여 아들을 삼았습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은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은 여수의 나환자촌인 애양원의 목사님이셨는데 애양원 교회에 당시로서는 거액인 2만원을 헌금하셨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 많은 액수를 헌금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동인은 약혼을 한 상태에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아들의 결혼과 유학을 위하여 비용을 모으셨는데 아들의 순교로 더 이상 그 돈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전액을 헌금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손양원 목사님 자신도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순교 당하신 다음 사모님과 안재선은 모자지간이지만 서로의 앙금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사모님과 안재선은 얘기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안재선은 소식을 끊고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이 양어머니와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사모님은 아무리 안재선을 양자로 입양을 했지만 안재선을 볼 때마다 자신의 아들들 동인과 동신이 생각나고 그 당시의 끔찍한 일들이 뇌리에 살아나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하였고 입양하여 아들을 삼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큰어머니인 사모님은 조카인 손동아 목사님께 아무리 애써도 마음으로 용서가 안 된다고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은 이래서 다른 것입니다.

그후 사모님은 노환으로 부산 복음병원에 입원하셨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병실을 찾은 손동아 목사님께 큰어머니는 동아야, 재선이가 보고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안재선이 보고 싶다는 그 말은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손동아 목사님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안재선을 찾아 함께 부산복음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실에 들어서니 사모님은 문을 향하여 누워 계셨고 손동아 목사님은 큰어머니, 재선이 형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아들 안재선은 어머니에게 다가가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리고 둘은 30분을 껴안은 채 흐느껴 울었습니다. 두 분이 나눈 대화는 재선아”, “어머니단 두 마디였습니다. 마침 회진차 들어왔던 의사들도 30분 동안을 석고처럼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30분 동안의 눈물에는 사랑과 용서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일 후 한 주 만에 사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사모님은 다음과 같이 실천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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