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작성자 : 웹섬김…
- 조회 : 52
- 25-06-01 07:30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 아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일서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사도요한이 기록한 첫째서신과 복음서는 그 서두가 일치한다. 영원한 말씀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우리가 언어를 공부하고 문학을 아끼지만 그 핵심에 주님의 말씀이 있다. 달리 말하면, 각 나라의 언어와 문학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영원한 말씀을 공부함이 가장 귀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 길이 내 삶이었다. 해서 성경을 보다 깊고 넓게, 성령님의 빛에서 바르게 읽는 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었다. 지난 1년 동안 톨스토이의 삼대 거작 부활,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전쟁과 평화를 영어로 읽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다른 두 권은 한국어로 미국 오기 전에 읽었었다. (전쟁과 평화는 올해 4월 한달 내내 읽었다.) 작년에는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 그리고 중편 두 권을 영어로 읽었다. 사오 개월 집중했다. 겸하여 이민진의 빠찡꼬를 재작년에, 김주혜의 beasts of the little land를 지난 주까지 해서 영어로 읽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어가 원전, 스타인벡과 이민진, 김주혜 등은 영어다. 한국어가 모국어, 영어는 아직도 서툴다. 그래도 신선한 창문이다. 독어, 중국어, 스페인어도. 고대 그리스 레토릭,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이나 심리학 이론도 참고하다가 치웠다. 그렇게 다양한 언어와 문학 렌즈를 번번이 갈아끼우는데, 과연 성경읽기는 내게 핵심주제다. 자기가 중심 되는 문학과 반대로 성경은 안에서 나오는 exegesis여야 한다. 말하자면 성경읽기는 엎드려 말씀듣기다. 모든 언어문학 공부는 성경읽기를 위한 발판이다. 여기다 인문학과 수학 내지 과학공부도 성경을 잘 읽는 길에 디딤돌 되었다. 미술사와 음악이론도 지나칠 수 없다. 이사야에서 바흐를, 시편과 욥기에서 베토벤, 쇼팽과 모차르트를 듣는다. 고흐의 불안과 렘브란트의 빛을 전도서와 아가의 행간에서 감상한다. 이제는 버리거나 누구에게 주어야 할 책들이다. (나는 읽기위해 책을 산다. 빌어온 책도 읽고야 돌려준다). 그런데 요새는 내 어머니 인도하던 가정예배 생각이 깊다. 학문이 없던 어머니는 오히려 놀라운 기도와 거룩한 은혜로 생명의 말씀을 증거했고 깊고 아름다운 기도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다. 사람이 얼마나 공부할 수 있는가. 알면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드론과 인공지능의 날개를 달면 시각과 지식정보가 색다를 테다. 그러나 자기 삶이 되어야 하는, 생명의 말씀은 여기 성경말씀이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생길을 인도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 그분께서 진리말씀이시다. 그분께서 내게 오셨다. 그분을 매일 만나는 나는 그 말씀을 증거한다. 설교다. 성경공부다. 벌써 죽은 나를 살리시고 복음사명 주신 내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늘 내게 오신다. 저건? 당신의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시는 그 음성이다.
댓글목록